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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참된 단식 -올바른 수행- 2013.2.15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3-02-15 조회수401 추천수6 반대(0) 신고

2013.2.15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이사58,1-9ㄴ 마태9,14-15

 

 

 

 

 



참된 단식

 

-올바른 수행-

 

 

 

 

 


오늘 아침성무일도 첫째 후렴입니다.

 

“하느님, 내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내 안에 굳센 정신을 새로 하소서”

 


바로 이게 수행이 목표하는 바입니다.


마음 깨끗함이 자비요 겸손이요 지혜입니다.

이런 마음을 궁극 목표로 하는 우리의 수행생활입니다.

 


오늘은 참된 단식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며칠 전 깨달음이 새롭게 떠오릅니다.


새벽 현관문을 여는 순간

현관 옆 어둠 속에 희미한 모습에 자세히 봤습니다.

고양이가 새벽부터 그릇에 담긴 사료를 먹고 있었습니다.

 


“아, 사는 것이 먹는 것이구나.”

 


저절로 나온 말입니다.

사는 것이 먹는 것이요 먹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도 엄연히 적용되는 엄중한 진리입니다.

 


‘먹자고 하는 일인데.’흔히 하는 말에서도

먹는 비중이 얼마나 큰 지 깨닫습니다.

현실을 봐도 세상 곳곳에 널린 것이 음식점이요,

점심 때 쯤 이면 외식하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우리 수도원을 봐도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성당과 식당입니다.

하루 세 끼 먹는 일이 얼마나 큰 지,

하여 먹는 것도 일이라 하여 식사(食事)라 합니다.

세기를 할 때 마다

사람 숫자 수의 숟가락을 맞춰보며 먹는 일의 중대함을 확인하곤 합니다.

 


사실 먹는 재미없으면 무슨 재미로 살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또 살기위하여 먹어야 합니다.

먹어야 기도도 하고 일도 하고 공부도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과식에 있습니다.

과유불급, 지나침이 부족함만 못하다는 말입니다.


대부분의 병도 영양과잉에서 생기지

영양결핍에서 생기는 경우는 드물다 합니다.

과식, 과음, 과로, 과욕, 과소비, 과속, 과신, 과잉 등

지나쳐 중도를 벗어날 때 생깁니다.


새삼 절제가 모든 수행의 근본임을 깨닫습니다.

 


단식은 물론 모든 수행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절대적이 아닌 상대적입니다.

누구에게나 강요할 수 없고 획일적 잣대를 적용할 수 없습니다.

 


굶기를 밥 먹듯 하는 자에게 단식은 무의미합니다.

먹어야 합니다.

심신의 병으로 밥맛을 잃은 이에게 저절로 단식이니 이 또한 무의미합니다.

단식은 주로 하루 세끼 챙겨 먹을 수 있는 이들이,

또 영양 과잉의 사람들이 해야 맞는 것입니다.


가장 뿌리 깊은 유혹이 식욕입니다.

하와를 유혹에 빠지게 한 것도 먹음직스런 선악과였습니다.

 

사실 영성생활에 제 영적, 신체적 수준에 맞는 단식은 참으로 유익합니다.


식욕(食慾)이 절제될 때

성욕(性慾)과 탐욕(貪慾)의 절제도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침묵 또한 외롭게 혼자 말없이 살아가는 이들이 아닌

법조인이나, 교사, 성직자 등 말 많이 하는 사람들에게 주로 해당됩니다.

 


좌우간 단식이나 침묵 등 모든 수행은 상대적입니다.

진정 절대적인 수행은 사랑 하나뿐입니다.


사랑에 의해 분별 받아야 하는 수행들입니다.

 

하여 참된 단식은 사랑의 표현이자 사랑의 실천으로 열려 있어야 합니다.


단식 뿐 아니라

모든 수행이 사랑의 표현이어야 하고 사랑으로 열려 있어야 합니다.

 


사랑 없는 단식은, 수행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 그대로 공허할 뿐입니다.


수행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구원 받기 때문입니다.


단식 수행한다 하면서

이웃이나 판단하면서 애덕을 거스른 다면 그 단식 무슨 소용이 있겠는지요.

 


‘안 먹고 교만한 것보다 먹고 겸손한 것이 낫다.’는

수행 상의 허점을 날카롭게 지적한 옛 아빠스님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 물음을 던지는 요한의 제자들은 단식자체가 목적이 된 듯합니다.

단식하며 단식하지 않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판단하는 죄까지 짓습니다.


‘먹보요 술꾼’이란 별명에서 보다시피 예수님은 단식에 자유로웠던 분입니다.

 

단식의 거부가 아니라 참된 단식을 깨달아 행했던 분입니다.

단식에도 분별의 지혜가 발휘되어야 함을 밝힙니다.

아무 때나 단식이 아닌 단식의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연중시기로 하면

예수님과 수난을 함께 하는 사순시기가 단식의 때이기도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 역시 참된 단식은 사랑의 실천임을 설파합니다.

단식한다 하면서

제 일만 찾고

일꾼들을 다그치며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면서

단식과 사랑의 삶이 유리된 이들의 행태를 신랄하게 지적합니다.


이어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참된 단식을 명쾌하게 밝히십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바로 구체적 사랑의 실천이

참된 단식이자 절대적 수행임을 천명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런 이들에게 부어지는 하느님의 한량없는 축복입니다.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 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주님은 매일 미사은총으로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고

굳센 정신을 새롭게 하시어

사랑 실천의 참된 단식의 삶에 항구하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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