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인간의 동시적인 고통 [인간의 비애]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3-02-24 조회수295 추천수1 반대(0) 신고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마태오, 루카>


여기서 사람들의 질문이 있습니다.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느냐, 이것에 대한 말씀은 왜 없을까 하는 물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100 마리의 양들을 위해서 길 잃은 양 1 마리를 찾는 것입니다.왜냐하면 예전의 글에도 쓴 적이 있지만 1 마리 길 잃은 양을 소홀히 한다면 그 나머지 99 마리의 양들도 그 1 마리와 같은 처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99 마리에서 또 1 마리가 길을 잃는다면 98 마리를 위해서 그 1 마리를 소홀히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97 마리가 되고 96 마리가 되며 점점 그 수는 95, 94.... 마리로 줄어 드는 것입니다. 99 마리의 양들을 위해서라도 길 잃은 1 마리의 양이 얼마나 소중한지 가르쳐 주십니다. 길 잃은 1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99 마리를 산에 남겨 두는 착한 목자의 행동에서 오늘 우리 시대의 현실에 견주어 보고자 합니다. 그 99 마리는 어떻게 될까요. 

사회에서나 교회에서나 훌륭한 목적을 선언합니다. 율법에서도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정신이 표방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그 목적대로 세부내용도 반드시 그러하다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사람이 만들어 내는 온갖 규정들의 세부 조항은 그 목적에 미치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사랑의 규정'들은 미흡할 수가 있습니다. 본래의 취지(사랑의 정신)에 부합하지 못하고 인간의 편리에 따른 독소조항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편리'란 기득권자들의 지배체제를 위한 편리를 말한다 하겠습니다. 자신들의 탐욕을 위한 독소조항(방침)들이 하느님과 이웃 사랑을 거스리는 규정(방침)들로 세워진다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의 정신을 위배하는 독소조항이 인간의 규정과 방침들로 정하여 집니다.

교회가 세속화 되면 얼마든지 '예수님의 사랑' 하고는 상관없이 이렇게 인간 권력(힘)의 논리가 교회를 지배하기 마련입니다. 그런 연유로 인하여 예수님께서는 그들에 의해 버림받았는데 곧 '예수님의 사랑'(하느님에게서 온 사랑)이 버림을 받았다 할 것입니다. 인간의 탐욕과 교회의 세속화로 만들어진 독소적인 규정들과 방침들은 '예수님의 사랑' 하느님의 사랑을 충분히 포용할 수가 없었다고 하겠습니다. 율법의 정신인 사랑을 거스리는 독소조항은 예수님께 억지로 적용되어지고 예수님은 버림을 당합니다. 그들의 목적에 따라 '예수님의 사랑'은 불필요한 가치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되어져 버립니다. 남겨진 99 마리의 안전과 평화 그리고 행복은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예수님의 사랑)으로 나머지 99 마리를 위해서 길 잃은 1 마리를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그 1 마리의 양 속에는 99 마리의 양들도 당연히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길 잃은 1 마리의 양이 그러한 체제 아래에서는 고통을 받기 보다는 일찍 숨을 거두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그 양'과 '그 양'을 버린 인간의 동시적인 고통 때문입니다.거친 삯꾼(직원)들에 의해서 당하는 그 양의 처지에 대하여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소문을 통해서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의 모든 비애가 그 공동체 속에 함축되어져 있습니다. '모든 비애'라고 함은 예수님의 사랑이 없고, 일찍 죽어 주기만을 바라는 처참한 '죽음의 문화'입니다. 율법의 겉 모습은 생명이지만 율법의 속 모습은 죽음인 것입니다. 인간의 탐욕과 교회의 세속화가 만들어낸 속 내면은 '예수님의 사랑'을 저버림 입니다.       

본성적으로 선한 삯꾼이 있는가 하면 제 본성이 일어나면 악한 삯꾼들도 있기 마련입니다. <내가 몰라서 아프게 했구나 미안하다 내가 고칠께> 하는 마음씨 보다는 <원래 그런 양이다> 라며 자신을 합리화 시키는 '예수의 공동체'가 아닌, '삯꾼들이 지배하는 공동체'가 그나마 마치 하느님의 나라인 것처럼 유지되고 있는 것은 인간의 동시적인 고통 (인간의 비애)이 서려있는 탓입니다. 여기에 생명의 문화가 들어오려면 1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예수님의 사랑'이 정착되어지는 길 뿐입니다. 권세자의 친척이라고 거친 행동(고통을 주는 행동)이 보호받고 인간이 만들어 낸 '예수님의 사랑'이 없는 규정(방침)들이 설친다면 '차라리 죽는게 낫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들이 됩니다. 조선족들은 아직도 쥐약을 먹여서 빨리 죽게 만들어 몰래 버린다고 하는 말이 쟁쟁하게 생각납니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