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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느님의 유일한 소망이자 기쁨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 2013.2.25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3-02-25 조회수348 추천수3 반대(0) 신고

2013.2.25 사순 제2주간 월요일 다니9,4ㄴ-10 루카6,36-38

 

 

 



하느님의 유일한 소망이자 기쁨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

 

 

 


어제 있었던 두 예화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어제 오후 수도원을 들렸던 한 형제가 갑자기 면담성사를 청했습니다.

청년 아들과 대판 싸운 후

고백성사를 통해 잘못을 용서받고 불편한 마음을 추스르려고 오신 분입니다.

 


“아들이 울면서 ‘나는 꿈이 없다.

  죽는 것이 꿈이다.

  자살하고 싶다.’”

라며 아들은 자신의 어려움을 호소했고

대화 도중 예기치 않게 부자간 큰 싸움이 벌어진 것입니다.

 


남의 일 같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아프고 무거웠습니다.


꿈에 부풀어 있어야 할 젊은이들뿐 아니라 정도의 차이일 뿐

남녀노소 막론하고 많은 이들이 꿈을 잃고 방황하는

안타까운 한국의 현실입니다.

 


꿈이, 비전이, 희망이 있어서 사람입니다.

꿈을, 비전을, 희망을 잃어버리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고 심신도 서서히 망가지고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보고 배우는 사람들입니다.

꿈이 있는 부모나 동료, 형제들을 보면서

위로와 격려, 용기와 힘을 얻어 잃었던 꿈을 찾기도 하는데

도대체 주변에 이런 꿈을 펼쳐가는 이들이 드물다는 게 참 불행입니다.


만일 그 부모가 어렵고 힘든 중에도 희망차게, 생생한 꿈으로 살았다면

그 젊은이도 그렇게 좌절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의 꿈은, 비전은, 희망은 무엇입니까?

대부분의 꿈이, 비전이, 희망이 헛꿈, 헛 비전, 헛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참 꿈은, 참 비전은, 참 희망은 하느님뿐입니다.

나이 들어가면서 헛것들은 사라지고 남는 유일한 꿈이자 비전, 희망은

하느님 하나뿐임을 깨닫습니다.

 


저는 젊은이의 말이 정말 충격이었고 깊은 깨달음이었습니다.

저는 청년의 한탄을 다음과 같이 하느님을 넣어 바꿔봤습니다.

 


“나는 (하느님 없이는) 꿈이 없다. 죽는 것이(하느님이)나의 꿈이다.”

 


하느님의 꿈으로 살아가는 믿는 이들입니다.

살아갈수록 하느님의 꿈 생생해야 행복한 삶입니다.

 


또 하나의 묵상은 캐나다의 뱅쿠버에 가면서 짐을 싸며 얻은 깨달음입니다.

간단히 짐을 챙긴다하면서 하나 둘 늘어나는 짐이었습니다.

 


“하느님께 갈 때는 짐이 없어 빈손이라 좋겠다.”

 


죽어 하느님께 갈 때는 누구나 무엇인가 갖고 가고 싶어도 갖고 갈 수 없고,

단 하느님과의 관계 하나만 지니고 빈손으로 가야합니다.

 


반가운 사람은 빈손으로 와도 반갑습니다.

하느님의 경우도 똑같을 것입니다.

당신을 닮은 당신과 소통이 잘되는 깊은 관계의 자비로운 사람이라면

하느님도 마음을 활짝 열어 환대하실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바로 이게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유일한 소망이자 기쁨입니다.

평소 생생한 하느님 꿈을 지니고 살아야

하느님을 닮아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저절로 자비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부단한 회개에 이은 용서를 통해

하느님을 알고 자기의 죄와 한계, 부족을 깨달아 알아갈 때

점차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다니엘처럼

주님을 고백하여 회개하는 것이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지름길입니다.

 


“아, 주님!

  위대하시고 경외로우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분!

  …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이처럼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정작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찬미와 감사에 앞서 죄의 고백입니다.


수도공동생활을 하면서도 ‘감사하다.’ ‘고맙다’는 고백보다는

‘잘못했다.’ ‘죄송하다.’ ‘미안하다.’라는 고백이 훨씬 고맙습니다.


감사보다 훨씬 힘든 게 잘못의 고백이지만

불통의 앙금을 푸는 데는 감사보다 훨씬 효과적입니다.

 


인도의 성자 간디는

‘내가 잘못했다(I was wrong)’의 명수였다는 일화가 생각납니다.

 


자기를 몰라 무자비한 사람이지

진정 자기를 알면 알수록 자비로운 사람이 됩니다.

 


웬만하면 ‘그럴 수 있지’ ‘그게 현실이지.’ ‘그게 사람이지’ 하며

너그럽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죄의 용서를 통해

자기의 한계를 알고 주님의 자비를 체험한 사람은 자비롭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처럼, 남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남을 단죄하지 않습니다.

 


남을 용서합니다.

 


남에게 줄 수 있는 한 줍니다.

 


인색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몰라서 남 심판, 남 단죄, 불관용, 인색이지,

진정 자기를 아는 사람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타인의 현실을 받아들입니다.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유일한 소망이자 기쁨은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비로운 사람이 거룩한 사람이요 완전한 사람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닮은 자비로운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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