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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꽃동네에는 최귀동 할아버지가 없다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3-02-26 조회수697 추천수0 반대(0) 신고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마태오 23,1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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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동네는 무극 다리 밑에서 병자 거지를 돌보는 '최귀동' 할아버지와 오웅진 신부님과의 운명적인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 얻어 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 >이라는 오웅진 신부님의 카리스마가 살아 있는 곳이다.

지금부터는 본인의 아주 짧은 이야기이다. 꽃동네에서 10년 동안을 지내며 갈등의 순간도 있었다. 먹고 자고 입는 것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갈등은 없었다.다만 약간의 적은 돈이 필요했고 그것 때문에 거지처럼 변한 자신의 삶에 회의한 적이 있었다.

그러던 중에 최귀동 할아버지와 오웅진 신부님께서 같이 찍은 사진을 보고 순간 자신의 삶도 다른 제 2의 '최귀동'이라는 존재를 직감했다.용기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사는 집은 집이 아니다. 남의 창고 방을 얻어 사니 보일러도 주방도 화장실도 없다.그래서 공짜다. 소개받은 집이다.

일주일에 하루를 일(노가다)해서 벌인 돈으로 '하늘이'를 10년동안을 돌보았다. 다른 아이들은 1 - 2가지 문제점이 있지만 하늘이는 무려 10가지나 된다. 그래서 지금까지 거지인 내가, 병자 거지를 보살피며 살아온 셈이다. 나도 '최귀동' 할아버지처럼 오웅진 신부님을 10년이 지나서야 만나게 된다. 

그분께서는 나를 많이 칭찬도 하신다. 주위에도 알리며 작년에는 방송 촬영도 했지만 아직 방송되지는 않았다. 아마도 약이 아니라 독이 된다고 생각해서인지 보류 중인듯 싶다 몇년 동안은 최귀동 할아버지 걸인이 무극 다리 밑에서 병자 거지들을 보살피듯 나도 무극 다리 밑과 같은 외진 처지에서 하늘이(10가지)를 돌보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으로 <육으로 낳은 자식이 아니라 영으로 낳은 자식>인 하늘이와 이별을 겪게 된다.사람은 자기 임의대로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갈라놓을 수 없다 하늘이는 한번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다시 또 '하늘이 아빠'와 갈라짐을 당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꽃동네에서 보살펴주기 때문에 걱정할게 없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 배를 채우는 것은 은총이지만 마음을 채우는 것이 행복이다. 하늘이도 영혼을 지닌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최근의 게시글 몇개를(꽃동네의 미래,하늘이의 십자가, 용서의 남용, 베드로의 눈물, 등)을 살펴보면 꽃동네는 예수의 공동체가 아니라 삯꾼들이 지배하는 공동체다.
 
꽃동네에는 최귀동 할아버지의 동상은 있지만 최귀동 할아버지의 정신은 없다. 교만해서가 아니라 나는 제 2의 '최귀동'으로 꽃동네에서 하늘이와 살다가 '빽'이 있는 거친 삯꾼(직원)에 의해 하늘이와 생이별을 겪고 있다.본질을 왜곡하고자 예수님에게 온갖 규정과 방침들로 옭아 매었듯이 나에게도 사랑의 본질을 왜곡시킨다.

꽃동네는 삯꾼들이 일하는 곳이고 예수의 제자들이 일하는 곳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의 공동체가 아니라, 삯꾼들이 지배하는 공동체라고 말한다. '예수님의 사랑'이 없다. '최귀동'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으며 그 정신은 없는 것이다. '최귀동' 부활의 삶이 없는 것이다. 사랑으로 다스려지지 않고 업무(일)로 다스려지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일은 삯꾼들이 한다. 그래서 삯꾼들이 지배하는 공동체이다.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행동하는 사랑학교'는 있다. 하지만 어떤 봉사자는 <나 홀로 수덕주의>다. 나보고 하늘이를 버리라고 한다. 많은 다른 병자들(가족들)이 있는데 한 아기만 돌본다는 것이 자기 영성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그런 심한 말을 할 정도이다. 이는 꽃동네 안에서 가족들의 고통이야 어찌되던 그가 보고 있는 <나 홀로 수덕자>의 모습에서 따라 배우기(흉내) 때문인 탓이다.

이와같이 꽃동네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배울 수 있는 보잘것 없는 사람을 섬기는 아래로부터의 영성이 없다. 그런데 '행동하는 사랑학교'는 있다. 오웅진 신부님의 카리스마와다른 기득권자들의 지배구조가 삯꾼이 지배하는 공동체 구조를 만든다 할 것이다. 정치에서와 같이 종교에서도 권력싸움이 있기 마련이며 기득권자들에 따라서 꽃동네는 달라진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삯꾼들에 의해서 점점 밀려난다. 육적으로 밀려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밀려나는 것을 말한다. 삯꾼들의 지배력이 커지고 예수님은 작아진다. 걸인 최귀동은 없다. 최귀동 할아버지와 오웅진 신부님간의 만남은 너무나 덩치가 큰 꽃동네에서 삯꾼들에 의해 빛바랜 사진이 되어진다.

제 2의 최귀동과 하늘이의 다리 밑 삶에서 오웅진 신부님과의 만남이 빛바랜 사진으로 변하는 것과 같아 보인다. 여기서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그렇게 지나칠 정도인 것이 결코 아니다. 참으로 몸소 자신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실천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꽃동네에 아직도 남아 있다.삯꾼들이 아닌 오웅진 신부님과 수도자들 때문에 꽃동네는 버려진 작은 이들에게는 희망이 살아있다.

거친 삯꾼이 증가하면 꽃동네는 '죽음의 도가니'가 된다. 버려진 이들의 고통과 버린 사람들의 고통이 <버려진 이들이 죽기 만을 기다리는> 죽음의 문화, 인간의 비애가 서려있게 되는 것이다. 구원이란 악으로부터의 해방이다(복자 요한 바오로2세 교황님) 한다.

버려진 인간도 사랑으로 마음이 채워지면 행복해 하는 영혼을 지닌 사람들이다. 거친 삯꾼들은 이것을 부정한다.자신들에 의해 얻어 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은총이다며 악용한다. 거친(학대하는) 삯꾼들이 없는 꽃동네의 거룩한 변모를 기원한다.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 어떻게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빼앗을 수 있겠느냐?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마태오 12,28 -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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