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아들의 입장에서 아버지의 입장으로...
작성자김영범 쪽지 캡슐 작성일2013-03-02 조회수420 추천수0 반대(0) 신고

                      
                            "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아우는 죽었다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거워 해야 한다 "    
                                                    ( 루카 15. 31, 32 )


오늘 복음에서 작은 아들은 결국 세파의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아버지께 돌아오기는

하나 그 이후의 전개에 대하여는 언급이 없습니다. 또한 큰 아들의 입장에서도 아버지의

충고를 듣고 순종을 하였는지 아니면 계속 작은 아들을 시기 했는지에 대하여서도 언급

이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묵상해야 하고 우리가 해피엔딩으로 살아 내야 하는 몫입니

다. 
 

한편, 우리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3명의 등장 인물의 모습을 연달아 바꿔가며 살고 있

습니다. 

작은 아들처럼 순간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살거나, 때론 큰 아들 처럼 남이 자기보다

잘 되는 꼴을 인정하지 못하며 살기도 합니다. 그러다 모든 것이 덧 없음을 알게 될 때,

두 아들의 삶을 다 포용할 수 있는
자비로운 아버지의 모습으로 살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점이 오늘 복음의 가장 큰 교훈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가 완벽한 해피엔딩으로 끝나기 위해서는 아들들은 각자의 삶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 부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작은 아들의 경우 자기가 지었던 과거의 죄에 대하여 자비로우신 아버지의 능력에 의지

하여 그 상처를 지워 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작은 아들은 기회가 있으면 다시 돈을

훔쳐 욕망의 세상으로 도망 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작은 아들보다 큰 아들의 인색함이 더 문제라고 봅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을 가까이 하는 예수님을 보고 시기 하는 바리사이와 율법주의 자들의

모습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아우를 시기하는 큰 아들의 본 모습입니다.

우리 주위를 보면

'나는 그동안 열심히 살아 왔는데 , 왜 나보다 못한 자들이 나보다 더  큰 대접을 받고 살

까? '

라고 생각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 해 보면 하느님 아버지의 입장에서 볼 때는 열심히 산 자나, 그렇지

못한 자나 똑같은 피조물이자 인간일 뿐입니다.  누가 더 많은 죄를 지었는가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누가 먼저 죄를 짓느냐를 관찰 하실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게 보면 지금의 내 모습이 설령 하느님께 적절치 못한 대접을 받고 산다 하더라도

그것은 차별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 됩니다.

이 간단한 논리를 간과함으로서 얻게 되는 피해가 얼마나 큰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나의 모습이 큰 아들처럼 남을 용납 하며 살고 있지 못하다면
 
  최고의 감동으로 유명한  오늘의 복음을 생각 하여   자비로우신 아버지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작은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벌이는 모습을 떠 올리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모두가 아버지 안에서 함께 하나로 어울어지는 완벽한 해피엔딩을 꿈꾸며,

희망을 가지고 살았으면 합니다.

오늘 복음이 완벽한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희망을 간직하며 살

라는 하느님의 메세지일 것입니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