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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만약에,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3-03-03 조회수292 추천수2 반대(0) 신고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만약에,
요나의 표징이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이루어졌다면?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마태 12,41)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 어찌했는가?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었다. 이 소식이 니네베
임금에게 전해지자, 그도 왕좌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자루옷을 걸친 다음
잿더미 위에 앉았다...(중략) ...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요나 3,4 이하 참조)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나보다 더 크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에 그 말씀을 들은 이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고 싶은 표징은 바로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했듯이 요나보다 크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들도 높은 사람부터 낮은 사람까지 회개하기를 바라시지 않으셨을까요?

요나의 표징을 통해 묵상해 본 내용은 이렇습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요나보다 더 크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했듯이 모두 회개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꼭 있어야 할 사건
이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꼭 있어야할 사건이 아니었다면
과연 유다의 사건도 꼭 있었어야 하는 사건이었을까요?

다음은 사탄에 대한 묵상입니다.
사탄은 누구인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면 사탄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이렇듯이 유다가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다가
사탄의 길(멸망의 길)을 간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면 사탄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길을 함께 가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그것을 버린다는 의미는
아닐까요?
유다가 버리지 못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이사 53,5)

유다가 버리지 못한 것과 내가 버리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
결국 육의 욕망들을 버리지 못한 것이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들의 악행의 씨앗은 어디서 시작될까요?
우리들의 죄악의 씨앗은 어디서 시작할까요?
곧 사람의 일(육의 욕망)을 채우려는 그 마음에서 시작하는 것은 아닐까요?

유다가 도둑이었고 그래서 예수님의 공동체의 돈 주머니에서 돈을 자주
훔쳐 냈다면 그것을 무엇에 쓰려고 했을까요?
유다의 온 마음은 돈(재물)에 있지 않았을까요?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제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그럼 유다는 누구를 섬긴 것일까요?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었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요한 12,6)

도둑이 남의 것을 훔쳐서 누리려고 하는 내용은 무엇일까요?
자신의 육의 욕망을 채우는 것 아닌가요?
유다가 가장 관심이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관심과 반대 되는 것 아닐까요?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도둑이었다고 하시는 말씀으로 묵상해 보면
도둑은 자기 자신의 육의 욕망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닌가요?

이상의 내용을 묵상해 보면 유다는 가난한 사람에게 관심이 있었던 사람도
아니요.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었던 사람으로 묵상합니다.
곧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의미도 되지 않을까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은
유다와 비슷한 사람은 아닐까하고 묵상해 보았습니다.
사실 저도 이런 사람입니다.
생각의 거의 모두가 저 자신의 육의 욕망이 채워지길 간구합니다.
이 세상 살아가며 육이 행복하길 얼마나 간구하며 살고 있는 사람인지
모릅니다. 곧 예수님께서 살자고 요청하시는 말씀에 귀기울이기보다
유다가 돈에 관심을 기울였듯이 저도 이 세상 살아가며 필요한 물질에
거의 온 마음을 쏟으며 그것을 채워주시길 무지 간구하며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공동체에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참 의미는 상실한 채
어쩌면 예수님을 내가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물질을 채워 주시는 분으로
모시고 살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열정은 오직 아버지의 나라가 이땅에 실현되는 것이었는데,
저의 열정은 나의 바램이 모두 이루어져 이 땅을 살면서 물질적으로
풍족하고 걱정이 없고, 건강하고 등 거의 나 자신에게 쏠려 있습니다.
아마 유다가 도둑이었고 돈 주머니에 큰 관심이 있었다는 보도는
저에게 "너는 지금 어디에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있니?"라고
물으시는 물음으로 들립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9-11)

하느님을 맞아 들이지 않고 하느님을 거부한 것은 우리들의 자유의지가
아닌가요? 유다가 예수님께서 요청하셨듯이 자신을 버리고(돈,또는 육의
욕망들)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랐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약에, 유다가 예수님께서 하자는 말씀 그대로 살려고 애썼다면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요? 또는 나는 지금 예수님께서 하자고 말씀하시는
그대로 살고 있는 사람인가요?

만약에,
유다가 예수님 살아 생전에 들려 주셨던 그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려고
애썼다면? 그래도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넘기는 일을 했을까요?

주님의 사랑에서 제외된 사람이 단 한사람이라도 있는가?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요한 13,1)

이렇게 사랑이신 주님께서 대(하느님의 백성)를 위해 소(유다)를 희생양으로
쓰셨을까? 저는 아무리 생각을 거듭 해도 유다는 사람의 일만 생각하다
멸망의 길은 간 것이라고 느낍니다. 만약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넘기긴 했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고 베드로 사도가 회개했듯이 공동체로 돌아와 죄를
고백하고 다시 시작하기를 원했다면 어땠을까요?

예수님의 제자단 공동체는 유다를 받아 들이지 않았을까요?
유다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음(자살)조차도 하느님의 뜻이었을까요?
이 사건도 하느님의 각본에 있는 그대로 유다가 걸어간 사건일까요?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예레 31,34 참조)
이 약속에서 유다만 제외시키셨을까요?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 너희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 하는냐?"(에제 33,11 참조)

사람이 사는 것을 기뻐하시는 주님께서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라고 미리
각본을 짜 놓으셨을까요? 사람이 사는 것을 기뻐하시는 주님께서 유다가
자살하라고 미리 각본을 짜 놓으셨을까요?

사람이 사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이 말씀에서 유다만 제외되었을까요?
유다의 슬픈 진실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긴 하였으나 그 고백을
누구에게 했는가는 아닐까요?

"그때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는 그분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신 것을 보고
뉘우치고서는, 그 은돈 서른 닢을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돌려 주면서
말하였다. '죄 없는 분을 팔아넘겨 죽게 만들었으니 나는 죄를 지었소'
그러나 그들은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 그것은 네 일이다.'하였다.
유다는 그 은돈을 성전 안에다 내던지고 물러가서 목을 매달아 죽었다."
(마태 27,3-4 참조)

자신의 죄를 고백할 대상이 하느님과 공동체가 아니고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었을까요? 그들에게 죄를 용서할 권한이 있었을까요?
유다는 스스로 자신의 입으로 자신이 어떤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고 있지
않는가요? 이것도 각본에 연출된 것일까요?

자신의 죄의 고백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들에게 죄를 고백한 것은
유다의 슬픈 진실이 아닐까요?

만약에,
유다가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에게 고백한 죄를 하느님 앞에서,
예수님의 제자단 앞에서 고백했다면,
유다에 대한 이야기는 성경에 어떻게 기록되었을까요?


이러한 틀 안에서 묵상을 정리해 보니 이렇습니다.
유다가 멸망한 것은 결국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은 결과라고.
당연히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스스로 제자가 되려고 찾아 왔든지
예수님께서 친히 뽑으셨든지간에 예수님을 스승으로 내지는 주님으로
모시려고 그 공동체에 들어 왔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고
그 따름이 삶의 모습으로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무엇을 따랐는가?
유다의 멸망의 문제는 이것을 묵상해야 옳은 묵상이 아닐까요?
유다의 역활이 이미 정해진 각본이라면 우리는 성경을 통해 전하는
유다의 사건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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