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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3-03-05 조회수350 추천수2 반대(0) 신고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마태 22,32)

 

어, 뭐야! 아브라함도 죽었고, 이사악도 죽었고, 야곱도 죽었잖아!

이렇게 묻는 질문에는 정말 그 의미가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정말 오랜 세월동안 이해하지 못하는 구절이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은 것은 아하, 그 의미를  이해하려면 올바른 질문을 드려야

그 답을 주님께 얻을 수 있음을 배웠던 구절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깨닫게 해 주시려고 하신 말씀일까?

이렇게 질문드렸더라면 어떤 답을 주셨을까?

 

이 말씀을 왜 하시고 계셨나를 먼저 봐야 했습니다.

이 말씀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에게 하시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들이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

(마태 22,29 참조)이라고 하시면서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이신가?

 

바로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아곱의 하느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탈출기에서 모세에게 하느님께서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알려 주시는

대목이었습니다.(탈출 3,6)

 

그렇다면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은 부활 신앙을 믿고 있었다는 의미가 되는가?

저의 기억으로는 창세기에서 세 분이 부활을 믿으며 돌아가셨다는 대목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구체적인 부분이 없다고 해서 아니다라고 할 수도

없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구절 마음이 끌리는 구절이 있는데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뭐라고 축복을 주시는가?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12,1-3)

 

아브라함에게 복이 될 것이다라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또한 너를 통하여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이 의미 안에서 부활을 조금 느낄 수

있다고 묵상한
것입니다. 부활이 뭡니까? 다시 사는 것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이 세상만 살고
죽은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그를 통하여 복을 받을 수 있겠는지요?

이 대목에서 이미 성인들의 통공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통하여 태어나는 모든 종족이 그 축복을 얻어 누리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아브라함이 부활하여

저 하늘 나라에서 하느님과 함께 자신들을 위해 빌어주고 있다고 믿지 않았다면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들려 주시는 말씀은 거짓이 될 수도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 장면은 바로 이것입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를 전해 주시는 장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루카 16,22)

 

사두가이파만 부활을 믿지 않았다고 했기에 이스라엘은 이미 부활을 믿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럼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은 아무런 조건 없이

그냥 살다가 죽어서 부활했을까?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전하는 세 분의 모든 이야기들은 세 분이 어떻게 하느님을 믿고, 어떤

습으로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셨는가를 전하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이 세분의 이름을 말씀하시면서 당신은 그런 하느님이시라고 하시는 그 의미는

무엇으로 나는 받아 들여야 하는가? 저는 그것이 궁금했습니다.

그것을 오늘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았습니다.

 

세 분을 만나 주신 하느님은 한 분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세 분을 다 같은

상황에서 같은 조건으로 같은 모습으로 만나 주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렇듯이 우리 모두도 각기 다른 모습 안에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난 하느님을 증거하고 나누고 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나를 만나주신 하느님만이 참 하느님이고 다른 형제가 만난 하느님은

다른 하느님인가? 그것이 아님을 배우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이 부분을 저는 복음서가 왜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 이렇게 네 복음서가

있어야 했는가도 묵상하게 된 계기입니다. 예수님은 한 분이셨고 모든 사건은

오직 하나였는데 네 복음서는 한 사건을 전하면서 조금씩 다른 모습을 전하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이 내용을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의미 안에서 이해해 보니 뭔가 조금 이해가 되었습니다. 구약의 각기 다른

세 분의 각기
다른 삶의 자리에서 그분들을 만나 주신 주님께서 또한 신약의

네 분의
복음사가의 삶의 자리에서 또한 그렇게 자신들을 만나주신 주님을

전하고 있기에
렇다는 것을 이해하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께서는

오늘 저 이 글라라의 하느님이시고 또한 수많은 형제 자매님들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각자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자신을 만나 주신 하느님을 묵상으로

나눔을 하는 내용을 두고 잘못된 묵상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나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나이에 따라 세상을 이해하고

받아 들이고 이해하고 소화시키는 능력이 각기 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자신이 만난 하느님을 전함에 있어서 그 내용이 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그가 나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들었을 수도

있고 그가 나보다 조금 어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도 가브리엘 천사가 찾아오시어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라는 인사말을 하셨을 때에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당장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에서 곰곰이 생각하셨다고 다른 장면

에서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각자 자신의 나이에 따라 자신의 눈 높이에 맞게 만나 주신 하느님을 글로

표현하다보니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올바로 알려 주시지만 어디 그것을 우리들이 제대로 다 이해하고

소화를 시킬 수 있는지요?

 

학교에서는 비슷한 나이의 또래들을 모아서 교육을 시키고 있지 않는지요?

그러나 종교적인 교육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고 있지 않는지요. 어제 세례를 받으신

형제나 오래전에 세례를 받으신 형제나 거의 같은 교육을 받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렇듯이 제 글을 보시는  분들도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모두 자신이 그동안 공부하고 이해하고 있는 그 안에서 제 글을 읽으실 것입니다.

아, 저 사람은 저런 모습으로 하느님과 살고 있구나!

그저 이렇게 봐 주시길 희망해 봅니다.

 

저도 오늘 이 과정을 통해 지금부터 어떤 마음과 시각으로 형제들의 글을 대할

것인가를 주님께서 깨우쳐 주시는 은총의 시간으로 받아 들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두 주님 안에서 이해하고 보듬어 주는 가운데 기뻐하고 행복하게

살아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동안 너무도 많이 주님을 아프고

슬프게 해 드렸습니다. 이제 주님을 우리가 웃게 해 드립시다.

 

모든 형제들이 주님 안에서 기쁘고 행복하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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