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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월 5일 사순 제3주간 *화요일(R)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13-03-05 조회수724 추천수16 반대(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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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5일 *사순 제3주간 화요일(R) - 마태18,21-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진정한 용서에 이르기 위해서...>


 

     영광스럽게도 예수님의 수제자로 선택된 베드로 사도, 수제자로서의 삶이 어떠했을까 묵상해봅니다. 물론 예수님과 함께 걸어갔던 3년간의 공생활 기간 참으로 행복했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지니고 있었던 자부심도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입니까? 이 땅에 오신 하느님이셨습니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 바로 그분이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던 능력의 메시아셨습니다. 이런 하느님의 수제자로 불림 받았다는 것 보통 영예로운 일이 아니지요.

 

     그러나 영예 이면에 반드시 희생이 따르는 것이 보통입니다. 수제자로서의 삶이 결코 녹록치 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제자단의 대표로서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하느라 힘든 일도 많았겠지요. 때로 반장으로서 제자들의 미성숙을 대표해서 스승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신랄한 꾸중도 엄청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제자들 사이에는 성격이 엄청 과격한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미성숙한 제자, 아직 인간 되려면 멀었던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시기심 질투심 많은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제자직은 세속적인 성공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수제자 베드로가 겪었던 스트레스는 무척이나 컸을 것입니다. 안 그래도 흔들리던 베드로, 좌충우돌하던 베드로였는데 그가 수제자로서 겪었던 고통은 참으로 컸을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 질문을 던지는 폼을 봐서 또 누군가와 엄청 심하게 부딪혔는가봅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씩씩 대면서 예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베드로 딴에 일곱 번이면 충분하겠지,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일곱 번입니다. 그만하면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한 것이고 더 이상 용서는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져 7이라는 숫자를 내세운 것입니다. 유다 문화 안에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충만과 완성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숫자이지요. 이 정도면 예수님께서 OK 하시겠지, 하고 일곱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요구는 끝도 없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말씀일까요? 용서고 뭐고 따질 필요 없이 무조건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밥 먹듯이, 숨 쉬듯이 습관적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바보처럼 살라는 말씀입니다.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 솔직히 너무하시다는 생각을 감출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배경을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우리의 영혼과 육신을 단 하루도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는 상태란 우리 몸에 별로 좋지 않은 종양 하나를 달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하느님 체험도 영적 생활도 요원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누군가가 남긴 깊은 상처, 평생 잊지 못할 모욕, 생각만 해도 온 몸이 부르르 떨리는 아픈 기억을 그저 묻어두고 용서한다는 것, 너무한 일이기도 합니다.

 

     때로 진정한 용서에 이르기 위해서는 명확한 진상파악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정중한 사과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때로 응분의 처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이 우리 마음처럼 순조롭게 이행되지가 않습니다. 상처는 더 큰 상처를 낫습니다. 온몸은 만신창이가 되어갑니다. 삶은 피폐해져만 갑니다.

 

     이런 위험성을 꿰뚫고 계시는 예수님이시기 우선 우리가 살아있으라고, 그래서 필요한 세월을 좀 더 보내라고, 언젠가 깊은 상처가 아무는 순간, 그때 가서 제대로 된 용서를 할 수 있으면 하라는 의미에서 “일흔일곱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족하기에 진정한 용서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완전하시기에 그분 도움에 힘입어 진정한 용서가 가능합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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