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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월7일(목) 성 남종삼님 등 5위 순교하신 날
작성자정유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3-03-06 조회수608 추천수0 반대(0) 신고
 


 

3월7일(목) 음 1/26

성 남종삼님 등 5위 순교하신 날






    베르뇌   시므온   새남터   1866.3.7
 
    도리   헨리코   새남터   1866.3.7
 
    블리외   루도비코   새남터   1866.3.7
 
    랑페르 브르뜨니에르   유스토   새남터   1866.3.7
 
    남종삼   요한   새남터   1866.3.7
 
                 


 


성 베르뇌 시므온
관 련 새남터 순교일 1866.3.7


 
 

‘베르뇌’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장 시므온 주교는
조선교구 제4대 교구장이며 한국명은 장경일(張敬一)이다.
 
프랑스의 르망 교구 출신인 장 주교는 1837년에 사제가 되었고
동양의 선교 지역인 베트남으로 건너갔다가 2년 동안 옥살이를 치르셨다.
그 뒤 만주 요동 지역에서 10여 년 동안 활동하셨고,
조선교구 제4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56년 3월에 서울에 도착하셨다.
 
깊은 신심과 신학을 겸비한 장 주교는
이 땅에서 10년 동안 사목 활동을 하시면서
배론에 한국 최초의 신학교를 설립하고
서울에 인쇄소 두 곳을 설립하는 업적을 남기셨다.
또한 당뇨병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사목에 힘쓰면서
여러 지역의 교우들을 열심히 돌보셨다.
 
1866년 2월 23일에 체포되어 감옥에서 앞무릎에 곤장 열 대를 맞고도
고통스러운 기색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으며,
3월 7일 백 유스토, 서 루도비코, 김 헨리코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하셨다.


*주교회의 중앙협의회 자료
 




베트남과 만주에서 13년 가까이 아시아 선교를 하시다가
잔혹한 박해 가운데 조선에 입국하여

최초의 신학교를 설립하시는 등 10년 동안 큰 발자취를 남기시고
새남터 형장에서 순교의 칼날을 받으신

겨레의 벗 성 베르뇌 시므온 주교님이시여
한국 교회를 위하여 천상의 축복을 보내 주옵소서!...아멘





성 랑페르 드 브르뜨니에르 유스토
관 련 새남터 순교일 1866.3.7


 
 


1866년 병인 박해 때에 순교한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인 백 신부는
프랑스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1864년에 사제가 되셨다.
 
수품 직후 동료인 김 헨리코, 민 루가, 서 루도비코 신부와 함께 고국을 떠나
이듬해인 1865년 5월 조선에 입국하셨다.
서울에 도착한 백 신부는 정의배(丁義培) 회장의 집에 머물며 한국말을 배워,
박해가 시작될 무렵에는 교우들에게 고해성사를 줄 수 있을 정도가 되셨다.
그는 정 회장이 체포된 다음 날인 1866년 2월 26일
장 주교의 하인이었던 이선이(李先伊)의 고발로 체포되어
갖은 문초와 형벌을 받았고,
3월 7일 새남터에서 28세의 나이로 장 주교와 함께 처형되셨다.

*
주교회의 중앙협의회 자료

 
 




조선 입국 1년,
겨우 고백성사를 베풀 수 있는 상황에서

28세의 젊음으로 새남터 형장으로 나아가신

성 랑페르 드 브르뜨니에르 유스토 사제시여

조선 평신도들의 안전을 위해 순교를 택하신
영원의 사랑으로
한국 교회의 벗이 되어 주소서!...아멘




성 도리 헨리코
관 련 새남터 순교일 1866.3.7


 
 


1866년 병인 박해 때에 순교한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인 백 신부는
프랑스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1864년에 사제가 되셨다.
 
수품 직후 동료인 김 헨리코, 민 루가, 서 루도비코 신부와 함께 고국을 떠나
이듬해인 1865년 5월 조선에 입국하셨다.
서울에 도착한 백 신부는 정의배(丁義培) 회장의 집에 머물며 한국말을 배워,
박해가 시작될 무렵에는 교우들에게 고해성사를 줄 수 있을 정도가 되셨다.
그는 정 회장이 체포된 다음 날인 1866년 2월 26일
장 주교의 하인이었던 이선이(李先伊)의 고발로 체포되어
갖은 문초와 형벌을 받았고,
3월 7일 새남터에서 28세의 나이로 장 주교와 함께 처형되셨다.

*
주교회의 중앙협의회 자료

 
 




조선 입국 1년,
겨우 고백성사를 베풀 수 있는 상황에서

배교자 이선이의 밀고로

28세의 젊음에 새남터 형장으로 나아가신

성 랑페르 드 브르뜨니에르 유스토 사제시여

저희가 끝까지 하느님을 떠나지 않도록
천상의 축복을 보내 주옵소서!...아멘





성 블리외 루도비코
관 련 새남터 순교일 1866.3.7


 

 


 

‘볼리외’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서 루도비코 신부의 한국명은 서몰례(徐沒禮)이다.
서 신부는 1840년 프랑스 보르도 교구에서 태어나 1864년에 사제품을 받고,
이듬해에 백, 김, 민 신부와 함께 충청도 내포 지역으로 들어오셨다.
그는 고해성사를 줄 만큼 한국말을 배운 뒤 공주 지방의 전교를 맡았지만,
임지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할 겨를도 없이 박해를 맞았다.
 
서 신부는 장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도 광주 근처의 교우 집에 숨어 있었지만
1866년 2월 27일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모진 고문을 잘 참아 내었고
여러 질문에도 한국말이 서투르다는 핑계를 대며 대답을 회피하였다.
마침내 그 해 3월 7일에 동료 신부들과 함께 새남터에서 참수되니
그의 나이 26세였다.

*주교회의 중앙협의회 자료
 
 




조선 입국 1년
공주 지역에서의 선교사 역할을 제대로 할 겨를도 없이
새남터 순교의 칼날에 희생되신


26세의 젊은 사제

성 볼리외 루도비코 님이시여
영원히 우리 교회의 벗이 되어 주소서!....
아멘

 





성 남종삼 요한
관 련 새남터 순교일 1866.3.7




 

남종삼님은 충청도 충주에서 태어나
남상교(南尙敎)님의 양자가 되셨다.
1843년 문과에 급제하고 1846년 경상도 영해 군수가 된 남종삼님은
항상 재물과 부녀자를 멀리하고 청백리로서
의덕과 겸손의 청빈한 생활을 하여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나
동료 관리들에게는 시기와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관직에 따르는 미신행위로 인해 한때 교회를 떠난 적도 있었으나
다시 교회로 돌아와서는 신앙생활에만 전념하셨다.

프랑스인 선교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고,
1863년 대원군의 명으로 정3품 승지(承旨)가 되어 왕족 자제의 교육을 맡으셨다.
그러던 중 1866년 러시아인들이 국경을 넘어와 통상을 요구하자
조정에서 문제거리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때 남종삼님은 홍봉주(洪鳳周), 이유일(李惟一)등과 논의 하여
영불(英佛) 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자는
소위 방아책(防俄策)을 대원군에게 건의했다.
대원군과 장 (베르뇌) 주교와의 면담이 이루어지는 듯 했으나
척신들의 압력, 장 주교와의 연락 지연,
중국에서의 천주교 박해 소문 등으로
실패했을 뿐더러
태도가 돌변한 대원군에 의해 병인 대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1866년 2월 고향인 제천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남종삼님은 중도에서
자신의 수배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도 고양군 축베더리로 피신했으나
2월 25일 주교의 하인 이선이(李先伊)를 앞세운 포졸들에게 체포되셨다.
그는 국청에서 6차의 국문(鞠問)을 받고 3월 7일 50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홍봉주와 함께 참수형을 당해 순교하셨다.

*주교회의 중앙협의회 자료

두메꽃


 

 




청백리의 모범이셨고
순교의 월계관으로 겨레의 꽃이 되신
성 남종삼 요한 님이시여

현세의 정치 지도자들을 위하여
천상의 기도를 보내 주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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