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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이웃사랑'만 남는 이유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3-03-07 조회수659 추천수9 반대(0) 신고



2013년 다해 사순 제3주간 금요일


<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니,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


복음: 마르코 12,28ㄱㄷ-34






그리스도


렘브란트 작, (1661)


     < '이웃사랑'만 남는 이유 >

            게으른 아들을 둔 부모가 있었습니다. 고생하며 재산을 모았지만 아들은 일을 싫어했습니다. 부모의 재산을 믿고 거창한 계획만 세우곤 했습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아들이 대견스러웠습니다. 어느 날 아내는 남편을 부추깁니다.

이제는 재산을 물려줘야 할 때가 되지 않았어요?”

남편은 말합니다.

자기 힘으로 돈을 벌기 전에는 재산을 주지 않을 작정이오.”

어머니는 아들을 불러 아버지의 뜻을 전합니다. 그러고는 돈을 주며 아버지께서 일해서 번 것이라 말하게 합니다. 며칠 후 아들은 아버지 앞에 돈을 내놓으며 말합니다.

아버지, 제가 일해서 번 돈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화로 속에 던져버립니다. 어머니와 아들은 깜짝 놀랐지만 입을 열 수 없었습니다.

얼마 뒤 아들은 어머니의 돈으로 또다시 말합니다.

제가 일해서 번 돈입니다.”

이번에도 아버지는 불 속에 던져 버립니다. 그제야 어머니는 남편을 이해하고 아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구나. 네 힘으로 돈을 벌어 오너라. 미안하구나.”

어머니의 눈물을 보고 아들은 정신을 차립니다. 그러고는 험한 일을 하며 돈을 벌었습니다. 아들은 어렵게 번 돈을 다시 아버지 앞에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또다시 화로 속에 던져버립니다. 아들은 깜짝 놀라며 뜨거운 화로 속에 손을 넣어 돈을 꺼내며 외칩니다.

아버지, 너무하십니다. 이 돈을 버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십니까?”

아들의 눈물을 아버지는 손을 잡고 말합니다.

이번에야 진정 내 아들을 찾은 것 같구나!”

[발췌: 신은근 신부님, 만남]

 

아버지로부터 내어나기만 했다고 해서 참 아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를 때에야 참으로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원하는 것의 핵심을 아는 것, 그것이 참으로 아들이 되는 방법인 것입니다.

 

사람 몸의 세포 수는 60조개 이상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위장세포와 같은 것들은 2-3일이면 죽지만 어떤 세포는 몇 년을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7년 정도면 우리 몸의 모든 세포는 완전히 물갈이가 된다고 합니다.

만약 몸이 나 자신이면 7년 전의 세포를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은 지금의 는 새로운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수십 년 전에도 나였고 앞으로의 나도 나일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나의 정체성은 몸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나의 정체성은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 나를 나로 만들어 주는 내 안에 있는 그 무엇인 것입니다.

교회도 50년 전까지만 해도 라틴어로만 미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라틴어를 알아들을 수 없는 신자들은 미사시간에도 묵주기도만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거치면서 미사나 성경 언어는 자국어로 사용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동안은 미사언어는 바뀌어서는 안 된다고 잘못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포가 새롭게 태어나고 바뀌지 않으면 오히려 사람에게 해로운 것처럼 어떤 것은 바뀌어야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는 아직도 무엇이 바뀌어야 하고 무엇이 바뀌지 말아야 하는지 온전히 인식하고 있지 못했던 것입니다. 즉 온전한 정체성을 확립하고 있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우리나라의 일부 진보주의자들은 미사 때 빵과 포도주 대신 떡과 막걸리를 사용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뀌어서는 안 되는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사실 무엇이 바뀌어야 하고 무엇이 바뀌지 말아야 하는 것을 잘 아는 것이 자신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을 잘 모르면 바뀌어야만 하는 것이 바뀌지 않게 하려고 두려움에 떨어야 하고, 혹은 바꾸지 말아야 하는 것을 바꾸려 하기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법도 시대마다 바뀌어왔습니다. 특히 성경의 법은 더욱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고 했다가 첫 사도회의 때 먹어도 된다고 입장을 선회하였습니다. 물론 이것도 많은 진통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선지 해장국을 먹으며 그 먹어서는 안 되는 피까지도 먹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죄가 안 됩니다. 법이라도 시대에 따라 변할 것은 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율법 학자가 모든 계명 가운데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이냐고 예수님께 물어보는 것은 이렇게 바뀌어서는 안 되는 모든 계명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핵심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즉 법에서 무엇이 바뀌어야 하고 무엇은 절대 바뀌어서는 안 되느냐는 것을 묻는 것입니다. 그러나 법의 정체성과 본질을 꿰뚫어보시는 예수님은 법의 중심은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임을 명백히 밝히십니다. 이것만 지켜진다면 그 조건 안에서는 다른 계명들은 상황에 따라 바뀌어도 큰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수긍하는 율법학자에게도 하느님나라가 멀지 않다며 칭찬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계명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을 어긴 것 하나로만으로 예수님을 모함했던 다른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제자들에게는 하느님사랑에 대한 법까지도 빼버리시고 오직,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이웃사랑의 법만을 남겨놓으십니다. 아직도 계명의 정체성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러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어떻게 되는 건가?’하며 불안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하느님의 뜻은 다름 아닌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면 또한 하느님 뜻을 따르는 것이니 하느님까지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증거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시는 것뿐이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수난을 하는 것이 곧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이었고 그래서 아버지께 대한 사랑이셨던 것입니다.

처음의 예화에서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나중에서야 깨달았고 실천했습니다. 아들이니 집에서 자야하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불러야 하는 등의 것들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열심히 일하고 그렇게 땀으로 번 돈의 귀중함을 알게 하고 싶은 것이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우리 아버지께서도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하라고 하신 것, 즉 이웃을 자기 몸처럼만 사랑할 수 있다면 외적으로 당신께 예배를 자주 드리는 것보다 훨씬 기뻐하시고 훨씬 우리를 당신 자녀로 여겨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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