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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월9일(토) 聖女 프란치스카 님..등
작성자정유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3-03-08 조회수366 추천수0 반대(0) 신고



3월9일(토) 음1/28

聖女프란치스카,聖도미니코 사비오 


 


프란치스카(3.9)

성인명

프란치스카(Frances)
축일 3월 9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설립자
활동지역 로마(Roma)
활동연도 1384-1440년
같은이름 방지가, 프란체스까, 프란체스카, 프란치스까, 프랜시스


로마의 성녀 프란치스카(Francisca)


 

 
 

성녀 프란치스카 로마나(Francisca Romana, 프란체스카)
이탈리아의 부유한 귀족인 부소(Busso) 가문의 파올로(Paolo)
자코벨라(Giacobella)의 딸로서 이탈리아 로마의 중심부인
트라스테베레(Trastevere)에서 출생하였다.
그녀는 13세 때에 인근의 부유한 영주인 폰치아노(Ponziano)
라우렌티우스(Laurentius)와 결혼하여 40여 년 동안
이상적인 결혼생활의 모범처럼 살았다.
그들은 자녀 일곱을 두었으나 둘은 어린 나이에 사망하였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금욕적인 기질이 강하였고,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하여 깊은 애정을 표현하곤 하였다.
그래서 흑사병과 내란으로 인하여 사회가 혼란할 때,
그녀는 자선활동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그녀는 시누이인 반노차(Vannozza)와 함께 로마의 걸인들을 위하여
조직적인 봉사활동을 전개하여 높은 성덕을 쌓아 나갔다.
그녀는 성 알렉시우스(Alexius)의 환시를 본 뒤로 앓고 있던 중병에서 회복되었고,
1400년 그녀의 아들인 요한 바티스타(Giovanni Battista)가 태어날 때까지
산토 스피리투(Sancto Spiritu)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였다.
또 다시 흑사병과 기근이 로마에 들이닥쳤을 때,
그녀는 이 재앙의 희생자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돕기 위하여
자신의 보석까지 팔았다.

그러나 그녀의 집안에 재앙이 닥쳐왔다.
1408년에 대립교황의 편이었던 나폴리(Napoli)의 왕 라디슬라오(Ladislao)
로마를 점령했을 때, 여자들은 남아 있었으나 교황의 편에 서 있던
남편 라우렌티우스는 피신해야만 했다.
게다가 폰치아니(Ponziani) 성이 약탈당하고 캄파니아(Campania)의 집도
불에 타버렸다.
그리고 1413년의 또 다른 흑사병 때문에 아들 에반젤리스타(Evangelista)가
희생되자 그녀는 자기 집을 아예 병원으로 개조하였다.
불행은 계속 이어져 2년 후에는 그녀의 딸 아녜스(Agnes)마저 사망하였다.

1414년경에 비로소 평화가 찾아왔고,
남편의 추방령도 해제되어 돌아오고 재산도 되찾았지만
남편의 건강은 아주 나빴다.
성녀 프란치스카는 남편을 간호하는 한편 그녀의 모범을 따르는
귀족 부인 등과 함께 자선활동을 계속하면서 봉쇄생활을 하지 않고
세상 안에서 자선을 실천하는 새로운 형태의 수도 공동체를
이루어 살기로 결정하였다.

1433년 3월 25일,
처음에는 마리아의 오블라티회(Oblate di S. Maria)로 알려졌지만
후에 캄피돌리오 근처에 있는 '스페키의 탑' 근처에 있다고 하여
토르 데 스페키의 오블라티회로 알려졌고,
다시 현재의 성 프란치스카 로마나의 오블라티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1436년에 남편이 죽자 그녀는 수녀원에 입회하였다.
성녀 프란치스카는 수녀원에 입회한 후 원장이 되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남은 4년 동안 엄격한 생활과 더불어 자선 사업에 전념하였다.
또한 그녀는 수차례나 환시를 보았고, 탈혼에 빠졌으며,
치유의 기적을 행하였고, 예언의 은혜도 받았다.
그녀는 대이교의 종말을 예언하였다.
그녀는 1608년 5월 9일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교황 비오 11세(Pius XI)는 성녀가 자신의 수호천사를 여러 해 동안 보았다는
이유에서 그녀를 자동차 운전자의 수호성인이자
이탈리아 가정주부와 미망인들의 모범으로 선포하였다.

*굿뉴스 자료집에서 발췌




부유한 가정의 부인이었으나
차츰 가정이 파괴되는 안팎의 고통 중에서도
자선활동에 전념했고

남편 사후에는 수녀회에 입회하여
주님 품에 안기는 날까지 거듭 자선에 몰두하는 가운데

신비 체험의 은혜로 이어졌던
성녀 프란치스카 님이시여
저희를 위하여 천상의 기도를 보내 주옵소서!....아멘


 




 


도미니코 사비오(3.9)

성인명

도미니코 사비오(Dominic Savio)
축일 3월 9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증거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842-1857년
같은이름 도미니꼬, 도미니꾸스, 도미니쿠스, 도미니크, 도미닉, 도밍고



성 도미니코 사비오(Dominicus Savio)


 
 
성 도미니코 사비오(Dominicus Savio)는 1842년 4월 2일
이탈리아 피에몬테(Piemonte) 지방 토리노(Torino) 근처의
산 조반니 디 리바(San Giovanni di Riva)에서
가난한 대장장이인 아버지 카를로 사비오(Carlo Savio)
재봉사인 어머니 비르지타(Birgitta) 사이의 10남매 가운데 하나로 태어났다.
 
그는 5살 때부터 매일미사의 복사를 하였으며,
7살 때에 예외적으로 첫영성체를 하였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사제가 되려는 소망을 불태워왔다.
성 요한 보스코(Joannes Bosco, 1월 31일)가 청소년 교육을 위하여
준비를 시작할 때 토리노의 성직자들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을 위한 자신의 사업을 도와주도록 의뢰하였는데,
성 도미니코 사비오의 본당 신부가 그를 추천하였다.
면담에서 돈보스코 성인은 이 소년의 영혼 속에 은총이 충만한 것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12살 때에 토리노의 종합기숙학교인
성 프란치스코 드 살(Franciscus de Sales, 1월 24일)의 오라토리오에 입학하였다.

성 도미니코 사비오는 성인이 되려는 열망으로
여러 가지 특이한 고행을 원하였으나 요한 보스코의 지도에 따라
특이한 고행보다는 매일 매순간 자기가 하는 일을 하나하나 충실히 하는데서
성화의 길을 찾았다.
그리고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회"를 결성하여 친구들과 더불어
성덕을 닦았다.
성인이 조직한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회는 신심적인 목적 외에도
요한 보스코를 여러 가지 구체적인 면에서 도와주었으므로,
성 요한 보스코가 살레시오회의 모체가 되는 모임을 결성했을 때
그 모임의 회원 22명이 주요 회원이 되었다.

한 번은 학교 내에서 두 학생이 돌을 들고 싸울 때,
도미니코는 그들 사이에 작은 십자가를 들고 끼어들어서 이렇게 말하였다.
“싸우기 전에 이 십자가를 먼저 보아라.
예수 그리스도는 무죄한 분이셨지만,
당신의 박해자들을 용서하시고 운명하셨다.
나는 죄인이다.
그리고 나는 앙심을 갖게 됨으로써 그분을 욕되게 한다.
자, 이제 싸워도 된다.
그러나 그 돌을 먼저 나에게 던져라.”
나이 어린 소년의 이 한 마디 말은 그의 인품과 성덕을 밝히는
중요한 말이다.

그는 학교의 규칙을 지키는데 지나칠 정도로 세심하였고,
그의 기도 정신은 당대의 어느 큰 성인 못지않았다.
가끔 돈보스코는 그의 과도한 열성을 탓하고 중지시킬 정도였다.
이럴 때마다 그는 “저는 큰일은 하지 못 합니다”고 하면서,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작은 일이라도 그것을 하렵니다.”
하며 대답하였다.
또 돈보스코가 그가 고행에 몰두하는 것을 다소 저지하였을 때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
“신심은 우리가 숨을 쉬는 공기처럼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어느 추운 겨울밤
도미니코가 얇은 시트 한 장을 덮고 떨고 있는 것을
돈보스코가 발견하고,
“왜, 이런 짓을 하느냐, 폐렴에 걸릴려고?” 하자,
그는
“우리 주님께서는 베들레헴의 구유에 누워계셔도 폐렴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라고 대답하여 돈보스코를 놀라게 하였다.

또한 도미니코는 아침 미사 때부터
몇 시간 동안 기도에 빠져 있을 때가 종종 있었다.
그는 이런 내밀한 기도 시간을 ‘나의 기분 전환’이라고 불렀는데,
이때 그에게는 마치 하늘이 열리는 광경을 보는 듯 하다고 말하였다.
한 번은 그가 이런 기도 중에서 일종의 환시를 보았다.
황량한 들판에 수많은 군중들이 있고,
곳으로 횃불을 들고 가는 어떤 사람을 보았다.
그는 이것을 돈보스코에게 이렇게 설명하였다.
“이 횃불은 영국 국민들에게 전해야할 가톨릭 신앙입니다.
” 돈보스코는 이 사실을 당시의 교황 비오 9세(Pius IX)께 알렸고,
교황은 이 말을 듣고 영국에 대한 큰 배려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건강은 날로 악화되고 폐렴까지 겹치자 건강 회복을 위해
1857년 3월 1일 집으로 보내졌다.
그는 예수님의 수난을 생각하며 수술의 고통을 견디어 냈지만,
3월 9일 아스티(Asti)의 몬도니오(Mondonio)에서 15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하느님, 당신께 영원한 찬미를 드리는 것이 저의 소망입니다.
아! 나는 정말로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있습니다"였다.
그의 시복은 1914년에 로마(Roma)에서 거행할 예정이었으나,
몇 가지 반대에 부딪혀서 돈보스코의 시성 후인 1950년 3월 5일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1954년 6월 12일 같은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는데,
교회 역사상 가장 나이 어린 성인 가운데 한 명으로서
소년 성가대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살레시오회에서는 성인의 축일을 5월 6일에 기념하고 있다.

*굿뉴스 자료집에서 발췌


 



돈 보스코 성인의 집에서 자라면서
작은 일 하나 하나에 성실함을 익히고

15세에 주님 품에 안길 때까지
작은 일 하나라도 주님 영광 위해 더 하고 싶었던 소년
성 도미니코 사비오 님이시여

청소년들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천상의 기도를 보내 주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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