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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3-03-09 조회수514 추천수8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3년 3월 9일 사순 제3주간 토요일



Everyone who exalts himself will be humbled,
and the one who humbles himself will be exalted.
(Lk.18,14)
 


제1독서 호세 6,1-6

 
1 자, 주님께 돌아가자. 그분께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 우리를 치셨지만 싸매 주시리라. 2 이틀 뒤에 우리를 살려 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어,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게 되리라. 3 그러니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그분의 오심은 새벽처럼 어김없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비처럼,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시리라.
4 에프라임아, 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너희의 신의는 아침 구름 같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슬 같다. 5 그래서 나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들을 찍어 넘어뜨리고, 내 입에서 나가는 말로 그들을 죽여, 나의 심판이 빛처럼 솟아오르게 하였다. 6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복음 루카 18,9-14

그때에 9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11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13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우연히 텔레비전을 보다가 번지점프를 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높은 곳에서 어떻게 뛰어내릴까 라는 생각이 들어 유심히 쳐다보게 되었지요. 사실 저 역시 그런 경험이 있거든요.

군대 훈련병 시절, 공수 막타워 훈련 시간이었습니다. 사람 심리상 가장 공포감을 느낀다는 11m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훈련이었지요. 훈련 조교는 뛰어내리기 직전까지 계속해서 얼차려를 시킵니다. 드디어 뛰어내리는 높이에 올라왔을 때 여러 가지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혹시 등에 매고 있는 안전 줄에 이상이 생기지는 않을까? 얼마 전에 이곳에서 큰 사고가 있었다고 하던데 내가 그 주인공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한 생각이 드니 도저히 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자 훈련 조교는 그 위에서 또 다시 얼차려를 시킵니다. 완전히 땀으로 범벅이 되었을 때, 저는 포기하는 심정으로 뛰고 말았지요.

번지점프를 뛰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더군요. 여러 가지 생각으로 망설이는 사람은 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무 생각 없이 곧바로 뛰어내리는 사람은 모든 것이 다 끝난 뒤에 “재미있고 신난다.”라고 말을 합니다.

주님 앞에 서는 것, 또한 주님과 함께 가는 것에 대해 우리는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주신 사랑을 보기 보다는 세상의 관점을 먼저 보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렵고 힘들어서 그 길을 걷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을 모두 내려놓고 주님께 뛰어들면 가장 기쁘고 커다란 행복을 간직할 수 있게 됩니다.

저는 종종 말합니다. 제가 이제까지 했던 그 많은 선택 중에서 정말로 잘한 선택은 주님과 함께 하는 이 길을 선택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저 역시 처음에는 두려웠고, 그래서 망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세상의 조건들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주님께 뛰어들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계기를 통해 과감하게 주님께 뛰어들 수 있었으며, 지금 현재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세상의 조건들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들의 큰 문제점은 이 조건들이 가장 중요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처럼 말이지요.

그는 세상의 관점으로 강도, 간음하는 사람, 세리 등과 비교하면서 자신은 옳고 그들은 틀렸다는 것을 주장하지요. 그러나 그 판단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 하느님의 몫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자신을 최대한 낮춰서 하느님의 자비를 청해야 할 뿐입니다.

세상의 관점을 쫓아 이것저것 생각하면 절대로 하느님께 온전히 뛰어들 수 없음을 기억하면서, 세상의 관점보다는 하느님의 관점을 찾아서 쫓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행복은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보다 삶이 우리를 어떻게 단련시키느냐에 달렸다(앤디 루니).



어제 강의를 했던 등촌1동 성당입니다. 부족한 강의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뜻밖의 행복

어제 낮에 갑자기 대전교구에서 본당신부로 있는 동창 신부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어~~ 미안~~ 내가 전화를 못 받았어. 어쩐 일이야?”

정말로 오랜만에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전화를 한 적이 없거든요. 단지 실수로 그 동창신부에게 전화가 되었고 얼른 끊는다고 끊었는데, 그 동창신부는 제가 전화를 했는데 자신이 받지 못한 것으로 착각했나 봅니다.

“내가 더 미안하다. 스마트폰이라 그런지 종종 내 뜻과 상관없이 전화를 걸더라고. 그런데 어떻게 너한테 전화가 걸렸을까? 아마 네 목소리 듣고 싶어서 그런가 보다.”

뜻하지 않은 전화 통화. 그러나 오랜만에 만난 동창의 목소리에 뜻밖의 기쁨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꼭 전국 동창들 모임 한 번 하자.”는 다짐도 서로 할 수 있었지요.

생각해보니 의도된 기쁨보다는 뜻밖의 기쁨이 더 큰 기쁨이 아닐까 싶습니다. 의도된 기쁨은 당연하다는 생각에 그렇게 큰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뜻밖의 기쁨은 예상도 하지 못한 일이기에 더 큰 만족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우리의 삶 안에서 이 뜻밖의 기쁨을 얼마나 많이 주시는지 모릅니다. 삶 안에서 내 뜻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만큼 이 세상 안에 주님의 뜻밖의 기쁨이 많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이 사랑을 기억하면서 더욱 더 힘차게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친구와의 뜻밖의 통화에... 주님과의 뜻밖의 만남을 생각할 수 있었던 뜻밖의 행복을 느꼈던 어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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