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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3-03-10 조회수558 추천수8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3년 3월 10일 사순 제4주일



"Father, I have sinned against heaven and against you;
I no longer deserve to be called your son."
But his father ordered his servants,
"Quickly bring the finest robe and put it on him;
put a ring on his finger and sandals on his feet.
Take the fattened calf and slaughter it.
Then let us celebrate with a feast,
because this son of mine was dead, and has come to life again;
he was lost, and has been found."
(Lk.15,21-23)


 
제1독서 여호 5,9ㄱㄴ.10-12

 
그 무렵 9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서 이집트의 수치를 치워 버렸다.”
10 이스라엘 자손들은 길갈에 진을 치고, 그달 열나흗날 저녁에 예리코 벌판에서 파스카 축제를 지냈다. 11 파스카 축제 다음 날 그들은 그 땅의 소출을 먹었다. 바로 그날에 그들은 누룩 없는 빵과 볶은 밀을 먹은 것이다.
12 그들이 그 땅의 소출을 먹은 다음 날 만나가 멎었다. 그리고 더 이상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만나가 내리지 않았다. 그들은 그해에 가나안 땅에서 난 것을 먹었다.


 
제2독서 2코린 5,17-21

 
형제 여러분, 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18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기신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19 곧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면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20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빕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21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복음 루카 15,1-3.11ㄴ-32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어제 봄맞이 짧은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같이 독서모임을 청년들과 바람을 쐴 겸해서 대부도의 해솔길을 다녀왔지요. 작년에 새로이 정비된 길이었는데 아름다운 정경을 볼 수 있었던 멋진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왕 대부도까지 가는 것이니 점심을 맛있는 곳에서 먹어야겠다 싶어서 소위 맛집이라는 곳을 찾아갔습니다. 정말로 사람이 많았습니다. 주차할 곳이 없을 정도로 주차장에서부터 이 집이 얼마나 유명한 곳인지를 알겠더군요. 그런데 사람들의 인기에 비해서 ‘그렇게 맛있는 집인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조금 싱겁다는 느낌과 함께 무엇인가가 중요한 한 가지가 빠진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래도 사람들은 이 집이 맛있다고 줄을 서서 찾습니다. 저는 별로라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맛있다고 찾는 것이지요.

사실 맛집의 기준이 무엇일까요? 사람마다 입맛이 분명히 다른데 어떻게 보편적인 기준으로 맛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라면을 먹어도 어떤 사람은 들 익은 꼬들꼬들한 면을 좋아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완전히 푹 퍼진 면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보편적인 맛집의 기준을 결정하기는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그저 내 입맛에 맞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공통의 입맛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입니다.

내 기준만으로 맛집을 결정할 수 없듯이, 내 기준만으로 이 세상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 모두에게 맞는 기준을 주신 주님을 따르지 않고 내 기준만으로 이 세상을 살려고 하는 것일까요?

주님께서는 모두에게 맞는 기준인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모두가 모두에게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사랑. 그 사랑이 주님의 기준이었으며, 이 사랑을 통해 이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기준인 사랑을 오늘 복음에서는 잃었던 아들의 비유를 통해 잘 보여주십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지도 않았는데도 미리 유산을 달라고 하는 불효막심한 둘째 아들이었지요. 더군다나 아버지가 물려주신 재산을 모두 탕진했습니다. 그 역시 알았습니다. 자신의 기준으로 볼 때에도 얼마나 못된 아들이었는지를 말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품팔이꾼이라도 되겠다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의 기준을 뛰어넘습니다. 이 못된 둘째 아들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은 물론 커다란 잔치까지 베풀어주시는 커다란 사랑의 기준을 보여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사랑의 기준을 이해하지 못하는 큰 아들을 오늘 복음은 보여주지요. 어쩌면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기준을 생각하고 따르기 보다는 내 기준만을 내세워서 당신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면서 불평불만을 던지는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 기준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하시고 인도하시는 주님의 그 큰 사랑의 기준만이 우리 모두의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기준인 사랑. 이 사랑을 이 사순시기에 어떻게 실천하고 있습니까?

 

소리 없는 것들이 우리를 살게 만든다. 아침마다 떠오르는 태양이, 달빛이, 우리를 숨 쉬게 하는 공기들이, 깊은 산에서 솟아나는 샘물이(공지영).

 
대부도 해솔길.. 너무 멋집니다.



사랑의 기준 안에서 그냥 즐겨 보세요.

학창시절 제일 싫어했던 과목은 국어였습니다. 국어시험, 글 쓰는 것이 너무도 힘들고 싫었습니다. 내가 쓰고 있는 말의 문법.... 더불어서 이 문법에 맞춰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싫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설마요? 라고 묻습니다. 책도 7권을 출판하고, 이곳저곳에 원고를 보내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매일같이 묵상 글을 쓰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오늘 새벽 솔직히 말하면, 저는 그냥 씁니다. 그냥 쓰는 것이 좋아서 계속 쓰는 것입니다. 만약 문법을 하나하나 따져야 했고, 국어사전을 펼쳐서 한 단어 한 단어에 신경 써야 했다면 아마 일찌감치 글 쓰는 것을 포기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 역시 심각하게 고민하고 연구하는 곳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즐기면 그만인 것이지요. 그때 더 많은 것들을 즐겁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의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어야 더욱 더 즐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글을 쓰는데 즐기면서 쓴다고 성의 없이 쓰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저 역시 한 문장을 쓰기위해 때로는 몇 시간, 아니 하루 종일 고민하기도 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글 쓰는 것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즉, 사랑하기 때문에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준인 사랑으로 즐겨보세요. 행복이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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