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사순 제4주일
작성자조재형 쪽지 캡슐 작성일2013-03-10 조회수321 추천수7 반대(0)


지난 화요일에 어머니를 모시고 왔습니다. 혼자 계시는 어머니와 함께 지내면서 이야기도 나누고, 수련장의 시설도 보여 드리고 싶었습니다. 기력이 좋으셨을 때는 제가 가게 되는 성당엘 먼저 다녀오셨습니다. 아들 사제가 살아가야 할 본당은 어떤 곳인지 먼저 눈으로 보고 싶어 하셨던 어머니셨습니다. 이젠 혼자서는 먼 곳을 가실 수 없으시지만 마음만은 예전과 같은 것 같아서 제가 새로이 사목하게 될 수련장으로 모셔왔습니다.

기력이 많이 없으신 어머니, 차에 타는 것도 힘들어 하시는 어머니, 조금만 걸으셔도 숨이 차시는 어머니, 총명하셨던 눈망울이 지금은 무엇인가를 찾는 것 같은 눈망울로 바뀌셨습니다. 며칠 함께 있는 것으로 자식 된 도리를 다했다고 여기는 저의 생각이 참 부족했습니다. 드시는 것, 걷는 것, 말씀하시는 것 그 모두가 예전 같지 않으신 어머니를 보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일 때문에 어머니를 다시 의정부의 집으로 모셔다 드리지만 꽃이 피면 다시 모시고 와서 함께 지내야겠습니다.

자식은 아무리 잘 하려해도 부모님의 사랑을 100분의 1 아니 1000분의 1도 따라할 수 없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몸이 불편하신 것인데 제 입에서 나오는 말은 퉁명스럽고, 짜증을 담아내고 있었습니다. 제가 아플 때는 온 종일 제 곁에서 잠도 주무시지 않고 간호 하셨던 분이셨습니다. 성적이 조금만 올랐어도 그것을 자랑스럽게 말씀하셨고, 사제가 되었을 때는 제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람이라도 된 듯이 기뻐하셨습니다. 그것이 자식에 대한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의 주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은 잘못을 하였지만 광야에서의 생활을 마치시고 드디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또한 오늘 복음에서 둘째 아들은 방탕한 생활을 뉘우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우리가 오늘 들은 것처럼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잘못과 둘째 아들의 허물을 탓하지 않고 돌아온 그 아들에게 따뜻한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줍니다. 그리고 오늘의 제 2독서는 왜 우리가 하느님과 화해해야 하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구원에로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제들은 인사이동을 통해서 새로운 곳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동료사제들 중에는 늘 불평과 불만이 있는 사제도 있습니다. “보좌 신부 때는 본당 주임신부를 잘 못 만나서 힘들었다고 합니다. 본당 주임신부가 되어서는 보좌신부를 잘못 만나서 힘들었다고 합니다. 보좌신부가 없는 곳에 가서는 모든 것을 혼자 하느라 힘들었다고 합니다. 신자가 적은 본당에 가서는 심심하다고 합니다. 신자가 많은 본당에 가서는 일이 많아서 죽겠다고 합니다.” 동료입장에서 참 안타깝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반대의 생각을 하는 동료도 있었습니다. “신설 본당에 가면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 수 있어서 좋고, 시골 본당에 가면 모처럼 쉬면서 건강을 돌볼 수 있어서 좋고, 보좌 신부가 열성적이면 일을 맡길 수 있어서 좋고, 보좌 신부가 의욕이 적으면 내가 할 일이 많아서 좋고, 신자들이 많으면 함께 할 일이 많아서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친구는 언제나 활력이 넘치고, 즐겁게 생활하는 것을 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있는 시간과 공간에 속한 장소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어느 곳에 있던지 나의 마음이 나의 삶이 어떤 가치와 어떤 기준으로 사느냐가 더욱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과 화해하지 못하고 나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고 이웃과 화해하지 못하면 내가 있는 삶의 자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으로 신음했던 이집트의 노예 생활과 고난의 삶을 살았던 광야의 연속일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과 화해하고 나 자신과 화해하고 이웃과 화해한다면 어느 곳에 있던지, 바로 그곳이 약속의 땅이 될 것이고 용서와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장소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바로 그 모습을 오늘 복음의 ‘큰 아들’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집에 있었지만, 모든 것들이 갖추어져 있었지만 자신의 동생과 화해하지 못하였고, 동생을 아버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큰 아들에게 아버지의 집마저도 약속의 땅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진지하게 생각합니다. 약속의 땅은 하늘나라는 장소와 거리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집에 있었어도 약속의 땅에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비록 모든 것을 탕진하고 남의 집에 노예처럼 살며 굶주림에 지쳤지만 하느님과 화해하고, 자신과 화해하고 이웃과 화해하면서 약속의 땅을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살 때 바로 그곳이 약속의 땅이 될 것입니다.

둘째 아들처럼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시면 이제라도 훌훌 털고 하느님께로 돌아가십시오. 큰 아들처럼 자신의 지위와 명예가 자신의 능력과 실력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시면, 그러한 오만과 교만을 떨쳐버리고 겸손의 옷을 입도록 하십시오. 그럴 때 우리는 사순절을 보다 뜻있게 보낼 수 있고 우리 모두는 새로운 삶, 부활의 삶에로 초대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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