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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느님 체험의 일상화 -기도와 일- 2013.3.13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3-03-13 조회수470 추천수6 반대(0) 신고

2013.3.13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이사49,8-15 요한5,17-30

 

 

 

 


하느님 체험의 일상화

 

-기도와 일-

 

 

 


오늘은 ‘하느님 체험의 일상화’라는 주제로 두서없이 묵상을 나눕니다.

박재희 교수의 글이 우리의 전례생활에 큰 도움이 되어 인용합니다.

 


“인문은 ‘인간 문양(文樣)’의 준말입니다.

  인간이 매일 같이 살아가며 그려내는 아름다운 문양이 바로 인문학입니다.

  인간의 감정을 글로 진솔하게 표현하는 시(詩)나,

  인간의 일상에서 만나는 많은 의식(禮),

  그리고 아름답고 황홀한 음악(樂)은 인문학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논어에서 시(詩), 예(禮), 악(樂)은

  인간이 더욱 인간다워지는 인간의 문양이라고 하였습니다.

  시(詩)는 잠자고 있는 우리 인간의 마음을 깨우고(興於詩),

  예(禮)는 우리의 삶을 반듯하게 세워주고(立於禮),

  음악(樂)은 우리의 삶을 완성시켜 준다(成於樂)고

  공자는 그토록 인문을 강조했습니다.”

 


바로 인문의 정신은 우리의 거룩한 전례를 통해 그대로 실현됨을 봅니다.

시편을 예의와 정성을 다하여 노래 기도로 바침으로

시, 예, 악이 삼위일체가 된 전례 안에서 하느님을 체험하고

더욱 참사람이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매일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례기도를 통해

하느님 체험의 일상화가 이뤄짐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찬양하라, 내 영혼아, 한 평생 주님을 찬양하라.

  이 생명 다하도록 내 하느님 기리리라.”

 


아침 성무일도 중 마음에 와 닿은 위의 시편구절 앞,

‘우리는 생활 속에서 우리 덕행으로 하느님을 찬미한다.’라는

아느노비오 교부의 주석이 이채로웠습니다.


비단 전례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일상생활이 주님께 찬미가 될 때

비로소 하느님 체험의 일상화는 완성입니다.

 

 

 


눈만 열리면 어디에서나 하느님 관상체험입니다.

비상한 하느님 체험이 아니라 일상에서의 평범한 하느님 체험입니다.


아침 촉촉이 내리는 봄비를 통해 오시는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얼마 전 호세아서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그분의 오심은 새벽처럼 어김없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비처럼,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시리라.”

 


봄비처럼 오시는 주님 앞에

겨울 추위는 저절로 물러나고 우리의 얼었던 마음도 녹아 부드러워집니다.

어느 촉촉이 봄비 내리는 아침에 써놨던 시도 생각납니다.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봄비

  하늘 은총

  내 딸아이 하나 있다면

 

 
  이름은

  무조건 봄비로 하겠다.”

 


하느님을 닮아 우리의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봄비’를 이름으로 한다면

참 예쁜 이름이겠습니다.

 

 

 


기도뿐 아니라 일상의 모든 일에서도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모든 일에 하느님은 영광 받으소서.’라는 분도회의 모토대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하느님의 영광을 목표로 하기에

그대로 우리의 일 중에서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기도와 일을 통해 하느님 체험의 일상화가 실현됩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기도에 전념하고 있을 때나 일에 전념하고 있을 때 보다

더 아름답고 매력적인 모습도 없을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끊임없이 일하고 계시기에 존속되는 세상입니다.

 

모든 생명체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자체가

하느님 일하시는 증거요 하느님 체험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닮고, 아드님을 닮은 사람은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입니다.

도대체 이런 주님을 보고 알게 되면 도저히 게으를 수 없습니다.

 


다음의 예들은 명시적은 아니지만

익명의 하느님 체험에 이른 경우라 생각됩니다.


인터뷰 기사 중 마지막 부분이 잊혀 지지 않아 나눕니다.

 

-방에 가득한 책들과 자료를 보면서 왜 피터 드러거나 스테판 악셀 등

 학자들이 100수를 누리는지 알 것 같았다.

 늘 세상사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하니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없어서가 아닐까.

 ‘마음을 비워야 새로운 세상이 들어온다.’라는

 조순 선생의 말을 모두에게 들려주고 싶다.-

 


‘나이 30에 죽에 70에 묻힌다.’라는 말도 생각이 납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에게 정년이나 은퇴가 없습니다.


하여 죽을 때까지 어떤 형태로든 부지런히 일해서,

나이 30에 죽어 나이70에 묻히는 게 아니라,

나이 70에 죽어 70에 묻혀야 할 것입니다.

 


모든 성인성녀들 역시 정년이나 은퇴가 없어

바로 죽는 날이 정년이요 은퇴였습니다.

죽어야 비로소 휴가요 휴식이었습니다.


불교의 법전 스님의 해제 법어 중 다음 내용도 신선합니다.

 


-해제 무렵 원오극근 선사에게 어떤 납자가 물었습니다.

 

“도대체 구순안거란 무엇입니까?

모든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법과 다르지 않았노라.”-

 

-승천사확 선사에게 어떤 납자가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도입니까?”

“모든 언행이 도를 드러내는 것이다.-

 

해제 법어는 다음처럼 결론을 맺습니다.

 

-결제공부가 모자랐던 이는 해제를 결제로 삼아

더욱 향상일로(向上一路) 해야 할 것이다.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철저해야 하느니라.-

 


일상의 모두가 하느님 체험의 장이기에

매사 지금 여기서 철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이사야가 이렇게 사셨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자비하신 아버지의 비유에 나오는

큰 아들이나 작은 아들처럼 살지만

예수님은 정말 아버지와 하나 되어 아버지의 아드님으로 사셨습니다.

 


우리 역시 그렇게 살라고 부름을 받았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할 때 하느님을 체험함으로

비로소 하느님 자녀로서의 자유와 기쁨을 누립니다.


비로소 참 나의 실현입니다.


우리를 위로하시고 가엾이 여기시는 주님을 체험할 때

치유와 샘솟는 기쁨입니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

  산들아 기뻐 소리쳐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주님과 일치의 체험보다 우리에게 힘이 되는 것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 중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여인이 제 젖 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해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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