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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가 졌다.” -한계의 영성- 2013.3.16 사순 제4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3-03-16 조회수379 추천수4 반대(0) 신고

2013.3.16 사순 제4주간 토요일 예레11,18-20 요한7,40-53

 

 


“내가 졌다.”

 

-한계의 영성-

 

 


새벽 ‘한계의 영성’에 대한 묵상 중

새벽 조간신문(한겨레)의 1면의 큰 글자가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내가 졌다.”

 


시민으로 돌아 온 유시민씨가

정계은퇴 이후 첫 인터뷰에서 수차례 되풀이 한 말입니다.


예전 ‘운명이다.’라는 책의 제목 역시 한계의 고백으로 깊은 울림을 줬듯이

‘내가 졌다’라는 한계의 고백 역시 깊은 울림을 줍니다.

모든 것을 다 놔버린 자유인의 겸허한 고백 같습니다.


인터뷰 내용 중 인상적인 대목을 나눕니다.

 


-책 제목은 <어떻게 살 것인가>이지만,

실제 내용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가깝더군요.

 

“그렇게 보셨어요?

 원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로 제목을 정하고 대선 전에 초고를 완성했어요.

 그런데 대선 결과가 나오고 분위기가 너무 침침했어요.

 실망한 분들에게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내놓으면 감당이 안 될 것 같더군요.

 대선 다음 날부터 사무실에 나와 완전히 새로 썼어요.

 어떻게 살 것인가와 어떻게 죽을 것인가가 분리되는 문제가 아니니까요.”

 

 
읽는 순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라는

제 예전 강론 제목이자 책 제목이 생각났습니다.


이어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요즘 제 삶의 고백과도 같은 자작시가 생각났습니다.

 


이 또한 제 한계의 고백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하루하루 살 수뿐이 없는 게 우리의 한계입니다.

 


하루하루 살았다는 얘기는 하루하루 죽었다는 얘기니

삶과 죽음은 하나임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적나라한 한계를 깨닫게 해주는 삶과 죽음입니다.

 


뱅쿠버에 갔을 때 제 자작시 제목을 인용한 본당 신부님의 대답에

폭소를 터뜨렸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20년 본당 신부로 계시다는 말에 놀라워 물었습니다.

 

“20년간 어떻게 사셨습니까?”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정확하고 짧은 대답도 없을 것입니다.

참 겸허한 한계의 고백입니다.

 


사실 살아갈수록

작아지는 세상에 작아지는 자기의 한계를 절감하지 않습니까?


자기는 작아지고 하느님은 한없이 커지는 것을 깨닫는 것이

겸손이자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얼마 전 교황 베네딕도 16세의 사임도 깊고 은은한 감동입니다.

떠날 때 잘 떠나는 것보다 어렵고도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깨달아 결단하신

교황님의 분별의 지혜와 겸손, 용기가 참 놀랍습니다.

 

그분의 신학이 삶을 통해 입증된 것입니다.


한계의 때를 알아 잘 떠나시니 그 동안 과(過)는 다 덮어지는 것 같습니다.

 

떠날 때 잘 못 떠나 그동안 공(功)이 다 덮여지는 것과는

좋은 대조가 됩니다.


전임 베네딕도 교황님과 새로 취임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이름이

서로의 한계와 더불어 좋은 보완의 대조관계에 있음을 봅니다.

 

 

 


-밖으로는 산

 안으로는 강

 

 산 속의 강

 

 천년만년 임기다리는 산

 천년만년 임향해 흐르는 강-

 

 

 


베네딕도 영성(산은 정주 서원, 강은 수도승다운 생활 서원을 상징함)을

요약한 제 자작시입니다.


베네딕도의 영성이 산의 영성이라면 프란치스코의 영성은 강의 영성입니다.

산과 강은 서로의 한계와 더불어 좋은 보완 관계에 있음을 봅니다.

 

저 역시 베네딕도 수도회의 수도자로서 제 수도명 프란치스코에 만족합니다.

밖으로는 산의 베네딕도를, 안으로는 강의 프란치스코를 사는 것이

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주 형제자매들의 한계의 고백을 듣곤 합니다.

한계 체험을 통해 깊고 넓어지는 내면에 확장되는 내적 자유입니다.

 


한계의 깊이에서 만나는 하느님입니다.

한계체험을 통해 깊어지는 겸손과 지혜요 자비로운 마음입니다.

 


며칠 전의 체험도 저에겐 신선한 감동이었습니다.

저와 의논 차 집무실에 들어 온 수사님이 음지쪽에 있던 작은 풀꽃 화분을

번쩍 들어 햇볕 따사로이 들어오는 남향의 창가에 놓은 것입니다.

까맣게 잊고 지내던 풀꽃 화분이 수사님의 사랑의 눈에 포착된 것입니다.


말 못하는 작은 풀꽃 화분이지만 그대로 구원체험이었을 것입니다.

 


순간 저는 이 작은 풀꽃 화분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깨달았습니다.


참으로 자기 한계의 자리를 벗어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수사님이 자리를 옮겨 주어 풀꽃화분이 한계를 벗어날 수 있었듯이

하느님의 은총만이 우리를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함을 깨달았습니다.

 


한계상황에서 주님을 체험할 때 이미 한계를 초월합니다.


위축되거나 주눅 들었던 마음은 비로소 자유의 해방감을 느낍니다.

 


바로 오늘 1독서의 예레미야와 복음의 예수님이 그 좋은 증거입니다.

두 분 다 사면초가의 한계상황에 있습니다.


한계상황 속에서 저절로 솟아나는 예레미야의 고백의 기도가

그를 구원했음을 봅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알려주시어 제가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당신께서 저에게 그들의 악행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정의롭게 판단하시고, 마음과 속을 떠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송사를 맡겨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사면초가의 한계상황에서 솟아난 예레미야의 기도입니다.

복음의 예수님 또한 대동소이한 사면초가의 한계상황입니다.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의 선입견과 편견의 벽은

그대로 예수님의 한계를 상징합니다.

이런 한계의 벽을 깨는 숨통과도 같은 성전경비병들과 니코데모입니다.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성전 경비병들은 예수님을 알아봤고,

한계상황 중의 예수님도 이들이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한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참으로 용기 있는 의인 니코데모의 조언입니다.

니코데모 역시 예수님에겐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

-德不孤(덕불고) 必有隣(필유인) -’ 라는 공자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제자리의 한계에 항구하고 충실히 살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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