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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무엇이든 내 안에 있으니 보이는 것이다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3-03-16 조회수752 추천수7 반대(0) 신고



2013년 다해 사순 제5주일


<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


복음: 요한 8,1-11





예수와 간음한 여인


렘브란트 작, (1644), 런던 국립미술관


     < 무엇이든 내 안에 있으니 보이는 것이다 >

              블랙스완이란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니나라는 총망 받는 발레리나의 이야기입니다. 니나의 어머니도 총망 받는 발레리나였습니다. 그러나 원치 않았지만 니나를 잉태하게 되었고 그의 발레 인생은 니나 때문에 포기해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 때문에 꿈을 포기해야 했던 엄마의 사정을 잘 아는 니나는 어머니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많은 연습을 하고 어머니 말에 어긋나는 일탈이란 것을 전혀 경험하지 못합니다. 항상 어머니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어머니를 만족시키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완벽한 발레리나가 되는 것을 꿈꿉니다. 이런 욕망 때문에 그렇게 일탈을 모르는 니나도 유명한 여 주인공의 립스틱이나 향수 등을 훔치기도 합니다. 그 여 주인공은 그러나 단장과 사귀고 있었지만 단장이 그녀를 밀어냅니다. 그리고는 백조와 흑조를 동시에 연기할 수 있는 주인공을 공개모집합니다.

니나에게도 이번만큼 큰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나 단장은 니나가 억압된 착한 이미지 속에만 살아왔기 때문에 음탕한 검은 백조를 연기할 수 있는 어두운 면이 나올 수 없음을 알고 그녀를 거부합니다. 니나는 결국 자신이 훔쳤던 립스틱을 칠하고 단장의 방에 가서 단장에게 다시 청합니다. 단장은 자신의 이전 여자가 칠했던 립스틱에 끌렸는지 그녀에게 갑자기 키스를 하고 그녀는 놀라서 단장의 입술을 물어버립니다. 이에 그녀 안에 감추어져 있는 어두운 본능을 발견하고 그녀를 주인공으로 발탁합니다.

그러나 공연 전날까지 니나는 그동안 엄마에게 억압되어 왔던 자신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선은 양심 때문에 오는 죄책감입니다. 화장실 거울에서 자신이 발랐던 립스틱으로 창녀라고 쓰여 있는 것을 발견하여 마구 지웁니다. 사실 이것은 자신 때문에 쫓겨나고 결국 자신을 망쳐가고 있는 이전 여 주인공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허상을 보게 되는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힘겹게 얻은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한 여자를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공현 날에는 자신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동료를 밀어 거울에 부딪히게 하고 그 깨진 조각으로 찔러 살해하고 화장실에 숨겨놓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환각이었습니다. 그녀는 환각 상태에서 깨진 유리로 자신의 배를 찌른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완벽하게 연기를 마치고는 죽어가면서도 자신이 완벽했다고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완벽해지고 싶었습니다. 하느님처럼 완벽해져야 한다고 속삭이던 것은 뱀, 즉 자신들의 자아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는 엄마가 자신의 자아입니다. 자신을 강박하는 주인인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는 그 완벽해지고 싶은 욕망 때문에 저지른 죄로 인해 몸을 가리고 나무 뒤에 숨습니다. 양심의 가책과 부끄러움으로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는 분을 무서워하게 된 것입니다. 환각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자신의 욕망인 프리마돈나를 얻기 위해 단장을 유혹한 그 립스틱으로 화장실에 그려진 창녀(whore)’란 글씨를 보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죄는 없는 것을 보게 만듭니다.

그 다음엔 자신의 죄책감이란 비싼 값을 치르고 얻은 것들을 남들이 빼앗으려한다는 착각을 하게 되고 그 사람들을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 뱀이 서로에게 그 탓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니나도 이렇게 된 데는 엄마의 탓도 있기에 엄마까지 미워하게 됩니다. 이는 하와가 뱀에게 그 탓을 돌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서로 탓을 하고 미워하게 되는 이유는 결국 자신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그 완전함을 지켜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미워하게 되지만 이는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서로의 탓을 했기 때문에 하느님나라에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동생 아벨을 죽였기 때문에 카인이 평생 쫓기는 삶을 살게 된 것과 같습니다.

 

니나의 삶에서 보듯이 자아나 세상의 시선 때문에 욕망이 억압되어 있다고 해서 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음탕한 눈으로 여자를 쳐다보기만 해도 간음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는 보는 것이 죄가 아니라 음탕한 마음이 속에 있기만 해도 그것이 죄가 된다는 말입니다. 내면에는 누구나 터지지 않은 폭탄처럼 죄의 성향을 품고 살아갑니다.

 

만약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간음한 여자에게 돌을 던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께서 바닥에 쓰신 것은 분명 돌을 던지려던 자들의 죄들이었을 것입니다. 만약 돌을 던진 사람이 있었다면 그 사람의 죄를 지우시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결국 자신이 던지는 돌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것입니다. 내가 살 길은 나도 같은 죄를 짓고 있다는 것입니다. 간음한 것이나 음탕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은 억압된 상태에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고 해서 돌을 던진다면 그래서 결국 자신이 맞게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서의 수산나의 이야기가 이를 잘 설명해 줍니다. 음탕한 두 노인은 수산나를 범하려고 하다가 결국 다니엘의 중재로 자신들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수산나를 음탕한 여인으로 고발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음탕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을 음탕하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1882년 프레드릭 카벤다쉬와 토마스 버크를 찔러 죽인 브라디라는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공공연하게 자신을 고발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용서를 하지 않으면 죽어서도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하며 그를 설득하려했지만 그는 그것도 잘 알고 있고 자신도 죽어 마땅한 사람임도 알고 있지만 자신을 고발한 그 사람은 용서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형 집행 전날, 한 수녀님이 그에게 면회 신청을 했습니다. 수녀는 그를 만나서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브라디씨, 저는 어떤 사람을 몹시 미워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해도 용서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데 사실 나의 신앙으로도 그를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수녀에게도 그런 일이 있습니까?”

브라디의 눈빛이 빛났고 수녀는 조용히 말을 계속하였습니다.

아무리 그를 용서해야 되겠다고 다짐하여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를 기회만 있으면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만 더해갑니다. 정말 어쩌면 좋겠습니까?”

수녀는 정중하게 문의했고 브라디는 제법 대견하게 대답했습니다.

안되지요. 용서하는 데는 까닭이 없지요. 그냥 마음을 풀어 버리면 되는 게 아닙니까?”

그게 안 되니까 말이지요. 그래서 신앙생활도 그만 두어야 하지 않을까하고 나는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천만에, 그러지 마시오. 용서할 수 있도록 좀 더 힘쓰셔야죠!”

이때 수녀는 브라디의 손을 잡으면서, 떨리는 음성으로 이렇게 말 했습니다.

좋습니다. 나는 뵈닉스 공원에서 버크를 죽인 당신을 용서하겠습니다. 그는 바로 나의 오빠입니다.”

그러자 브라디는 충격을 받은 모양입니다. 그 큰 눈을 한참 감고 있더니, “죄송합니다. 그리고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저를 고발한 사람을 지금 용서합니다. 이제는 마음이 후련합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돌을 던지려고 하는 그 많은 사람들의 죄는 내가 이전에 비슷한 죄를 지었건 짓지 않았건 이미 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죄들입니다. 나도 그런 죄가 있다면 돌을 던질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한다면 이미 돌을 던진 것이기 때문에 나 자신의 죄도 단죄 받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것입니다.

나에게서 나가는 것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대로 나에게 돌아오는 부메랑과 같습니다. 내가 좋아하거나 미워하는 내 앞에 있는 사람이 결국 나를 비춰주는 나의 거울입니다. 결국 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내 안에 꽃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이 돼지로 보이는 이유는 자신 안에 돼지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니 남을 판단하는 것이 곧 자신을 판단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그 여인을 심판하지 않으신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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