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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죄인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작성자김세영 쪽지 캡슐 작성일2013-03-17 조회수698 추천수4 반대(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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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5주일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 요한 8,1-11




            죄인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우리를 악의 세력에 머물게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구원을 주시고자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시어 당신의 사랑을 깨닫게 하고자 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자비와 용서로 드러납니다. 이 시간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면 화를 내고 못된 사람이라고 욕합니다. ‘세상에 저런 사람이 다 있느냐?’고 할 때도 있습니다. 더더구나 ‘성당에 다니는 사람이 그럴 수 있느냐? ’고 말합니다. 나는 의로운 사람이고 상대는 못된 사람이라고 단죄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정작 자기도 잘못을 범하고 있으면서 그 사실은 잊고 삽니다. 그러나 남을 탓하기에 앞서 내 마음속에 있는 욕망과 무질서를 먼저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교회는 성인들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이 아니라 죄인들을 치료하는 병원”(모튼 켈시).입니다.

 

유다인들의 지도자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말하였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이것은 여인을 단죄하기보다는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고자 하는 속셈이 더 컸습니다. 사랑과 자비, 용서를 가르치신 예수님께서 “이 여자를 돌로 치시오.” 하고 그를 단죄하면, 지금까지의 가르침이 헛된 것이요, 위선자가 됩니다. “여자를 돌로 치지 마시오.” 하고 단죄하지 않으면, 전통의 율법을 어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그야말로 고약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하십니다. 그리고는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습니다. 무엇이라고 쓰셨을까요? ‘너 자신을 알라!’ 하셨을 까요? 아니면, ‘거기 있는 사람들의 죄목을 하나하나 쓰셨을 까요?’ 어찌 되었든 무엇인가 쓰고 계실 때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습니다(요한 8,9). 그들은 과연 자신이 돌을 던질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여인을 단죄하기 이전에 먼저 자기 자신부터 냉정하게 심판해야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의로운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 깨닫는 이 없고 하느님을 찾는 이 없다. 모두 빗나가 다 함께 쓸모없이 되어 버렸다. 호의를 베푸는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 그들의 입은 저주와 독설로 가득하고 발은 남의 피를 쏟는 일에 재빠르며 그들이 가는 길에는 파멸과 비참만이 있다”(로마3,10-16). 하늘 아래 죄인 아닌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돌을 던지지 않고 자리를 떠난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는 주님의 한 말씀에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지나온 과거를 속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리를 떠났습니다. 사실 자기가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결코 돌을 집어 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죄인을 만나게 됩니다. 잘못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우리는 바리사이처럼 고발하고 단죄하는 모습이 아니라 몸을 굽히시어 죄인의 처지가 되어 주시는 예수님의 태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고 계셨다는 것이 마음에 듭니다. 즉각 판단을 내리지 않으시고 여유를 주셔서 자신의 속을 보도록 해 주셨다는 것이 은총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자신의 속을 보고도 돌을 들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남의 허물에는 엄격하면서도 자신의 허물에는 한없이 관대합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모습 때문에 더 큰 자비가 필요합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충만히 내렸다(로마5,20)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허물이 많은 우리에게 주님의 충만한 은총이 주어지길 빕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은 사랑하지만, 죄는 미워하십니다. 무조건 눈감아 주는 것이 용서가 아닙니다. 자신의 죄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용서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죄를 인식한다 하더라도 통회하지 않는다면 용서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나아가 얼마나 진심으로 통회하느냐에 따라서 용서의 체험도 달라집니다. 깊이 통회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용서를 그만큼 깊이 체험할 것이고, 적게 통회하는 사람은 그만큼 적게 체험할 것입니다(송봉모). 그러므로 고해성사를 준비할 때 성실한 양심성찰과 통회, 죄를 짓지 않으려는 결심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같은 마음으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이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복수는 복수하는 사람과 당하는 사람 모두를 파멸시킵니다. 그러나 용서는 용서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모두를 축복합니다. 복수를 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함으로써 승리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7,3). 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허물을 인정할 수 있는 깨달음을 얻게 되길 기원하며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주시는’(마태5,45) 아버지 하느님,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하시는 주님의 자비를 체험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잊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기억하시죠? 천국에 가면 세 번 놀란다고 했습니다. 꼭 와 있을 것으로 생각한 사람이 보이지 않아서, 지옥에 떨어질 것으로 생각한 사람이 와 있어서, 결정적으로 자기 자신이 거기에 와 있어서 놀란답니다. 우리는 겉모양으로 판단하지만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 앞에서 편협한 비판이나 판단은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 성인이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제 평생 소원은 다시는 당신 마음을 상하게 해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도록 필요한 은총을 주십시오.” 이 기도를 들은 하느님께서 크게 웃으시며 대답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똑같은 은총을 구하는 구나. 그런데 내가 그런 은총을 모든 사람에게 준다면 도대체 나는 누구를 용서해줄 수 있단 말이냐?”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분입니다. 한계와 죄스러움 속에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시작하시기를 바라십니다. 언제나 자비로움으로 나를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기쁨으로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단죄했던 이웃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불가타 성경을 만든 예로니모 성인은 오랜 세월 성욕에 시달리며 살았답니다. 성인은 성경번역에 더욱 열정을 쏟아 넣어 자신의 정욕을 승화시키려고 했습니다. 어느 날 성인이 기도하고 있었는데 주님께서 아기 예수님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너무 기뻐서 “사랑하는 예수님, 제 정성을 다하여 선물을 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이 가장 기뻐하실 선물이 무엇인지 말해 주십시오.” 그랬더니 아기예수님께서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다 나의 것인데 그대가 나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나 예로니모 성인은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그래도 당신을 사랑하기에 무엇인가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수도자라 가난하지만 마침 어떤 이가 좋은 곳에 쓰라고 돈을 주었는데, 드릴 터이니 받아주십시오.” 예수님은 웃음을 띤 얼굴로 대답하셨습니다. “그 돈은 그대가 직접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라. 나는 돈이 필요없으니까.” 그런대도 예로니모가 계속고집하자 예수님께서는 웃음을 거두시고 엄숙한 표정으로 “그대는 정말 내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 채울 선물을 주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대의 모든 죄와 욕망을 나에게 주어라. 내게 필요한 선물은 바로 그것이다. 나는 너의 죄와 욕망 때문에 십자가에서 다시 죽을 것이다. 이것만큼 내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 채울 선물은 없으니.” 예로니모 성인은 이 환시체험 후 두 번 다시 성욕에 시달리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우리의 허물을 온전히 주님께 맡겨 드려 자비를 입고 자유를 누려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위대한 수학자요 천문학자이며 과학자였던 코페르니쿠스가
죽음을 앞두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 유언을 따라 묘비명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새겼습니다.


 “나는 바오로가 가진 특권을 구하지 않습니다.
나는 베드로에게 주신 능력도 구하지 않습니다.
나는 다만 십자가에서 강도에게 베풀어 주신 용서를 원합니다.”
용서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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