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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죽음이 없는 영원한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신앙의 해[120]
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03-21 조회수397 추천수0 반대(0) 신고


                                       그림 : [이스라엘] 나자렛 주님 탄생 예고 대성당 옆면

현대의 정신 건강에서 가장 큰 위험 요소이며
수많은 정신 질환의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인 불안은 죽음에 대한 공포심이다.
이 공포와 불안에서 해방되어 참된 자유를 누리려면
하느님께 온전히 우리 자신을 봉헌하는 길밖에 없다.
왜냐면 생명자체이신 하느님 이외에
그 누구에게서도 명쾌한 해결책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일 게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영원으로부터 나신 분이시지만,
유다인들은 그것을 모른다.
우리는 ‘내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지만
하루살이는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리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보고 듣고 만질 수 없는 저 너머까지 보는 그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할 게다.
우리가 이 믿음으로 볼 때 존재의 깊은 영혼까지 꿰뚫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수녀님이 친구 수녀 어머니의 장례 미사에 참석하고 전한 이야기이다.
그 어머니는 한평생을 아름답게 사시다가 여든아홉의 연세로 선종하셨다.
평소 고인의 뜻대로 시신까지 기증한 터라
묘지까지 갈 필요도 없이 장례 미사로 모든 것이 끝났다.
너무 짧게 장례 절차가 끝나 한편으로 허망도 했지만
수녀님은 여기에서 삶과 죽음이 다른 게 아닌 하나라는 걸 깨달았단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대한 갈등은
삶과 죽음을 분리는 그들과 하나로 보는 예수님과의 차이일 게다.
유다인들 눈에는 믿음의 조상들을 죽음과 함께 사라진 존재로 보았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모두 하느님 안에 살아 있는 존재이기에.
하느님 안에서 삶과 죽음이 서로 다르지 않으며 하나로 통합되어 있기 때문일 게다.
하느님의 영원성 안에는 시간도 공간도 삶도 죽음도 모두가 하나이다.

따라서 주님 안에서 삶과 죽음을 분리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바오로 사도가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로마 14,8)이라고
고백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삶과 죽음을 분리하지 않고 함께 보면 우리의 두려움과 슬픔이 훨씬 줄어들 게다.
나이가 들수록 죽음을 자신의 삶에 초대해서 함께하는 연습을 해야 한단다.
살아 있을 때 주님 안에 살면 죽음은 슬픈 현실이 아니라 삶의 한 과정이리라.
 

사람들끼리의 계약은 어떤 경우에는 이득을 얻지만 때로는 손해도 볼 게다.
그러나 하느님과 맺은 계약은 결코 손해가 없다.
우리가 계약에 성실하기만 하면 큰 축복이 내려진다.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놀라운 일을 보여 주실 게다.
바로 영원한 생명이다. 눈물도, 고통도, 죽음도 없는 하느님 나라이다.
예수님은 바로 그 나라의 축복을 위하여 오신 분이시다.
 

그분께서 결국 모든 삶과 생명을 주관하시는 것을 인정하며 그분께 우리를 드릴 때,
우리는 삶과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리라.
그러나 이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느님께 의탁하는 믿음이 없다면
분명 불안을 느끼게 될 게다.

신앙의 해를 보내는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주실 그분을 언제나 삶의 중심에 모셔야 한다.
이처럼 우리 삶의 시작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이기에
죽음도 그분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건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다.
또한 시작과 끝이 있는, 찰나와 같은 이 삶을 허락하신 분이 하느님이시기에
죽음이 없는 영원한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 또한 그분이심을
우리는 확실히 믿어야 할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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