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3-03-21 조회수819 추천수10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3년 3월 21일 사순 제5주간 목요일



"Amen, amen, I say to you,
whoever keeps my word will never see death."
(JN.8,51)




 
제1독서 창세 17,3-9

 
그 무렵 3 아브람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자, 하느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4 “나를 보아라. 너와 맺는 내 계약은 이것이다. 너는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5 너는 더 이상 아브람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너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 내가 너를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6 나는 네가 매우 많은 자손을 낳아, 여러 민족이 되게 하겠다. 너에게서 임금들도 나올 것이다.
7 나는 나와 너 사이에, 그리고 네 뒤에 오는 후손들 사이에 대대로 내 계약을 영원한 계약으로 세워,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 8 나는 네가 나그네살이하는 이 땅, 곧 가나안 땅 전체를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영원한 소유로 주고, 그들에게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
9 하느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계약을 지켜야 한다.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이 대대로 지켜야 한다.”


 
복음 요한 8,51-59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5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52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그러하였는데, 당신은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하고 있소. 53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당신이 그분보다 훌륭하다는 말이오? 예언자들도 죽었소. 그런데 당신은 누구로 자처하는 것이오?”
54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면 나의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너희가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하고 말하는 바로 그분이시다. 55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 나도 너희와 같은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57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당신은 아직 쉰 살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오?”
5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59 그러자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다.





새벽에 일어나 녹차 한 잔 마시기 위해 물을 끓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에 집중하다 보니 끓었던 물이 다 식고 말았네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녹차 티백을 완전히 식어 버린 차가운 물속에 넣고 한참을 기다렸습니다. ‘이 정도면 됐겠지?’하면서 차를 마시는 순간, 기대했던 따뜻한 물에 잘 우러난 녹차의 맛이 아니었습니다. 차가운 물과 함께 떫은맛이 입 안을 가득 메우면서 도저히 마실 수가 없더군요.

사실 차가운 물과 뜨거운 물중에서 어떤 물이 더 마시기 쉬울까요? 당연히 차가운 물이 마시기는 편합니다. 그러나 녹차를 우려낼 때에는 차가운 물이 아니라 뜨거운 물에 우려야 깊고 진한 맛을 낼 수 있습니다. 차가운 물이 마시기 편하다고 그 안에 녹차를 넣으면 기대했던 맛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사실 많은 이들이 쉽고 편한 것만을 쫓습니다. 그 누구도 어렵고 힘든 삶을 선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과정 안에서의 아픔과 상처를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삶을 돌이켜보면 어렵고 힘든 시간을 잘 극복했을 때 스스로 더 성장했었음을 발견할 수 있지요. 뜨거운 물에 우려난 차가 더 깊고 진한 맛을 내는 것처럼, 고통과 시련 속에서 더욱 더 깊고 진한 삶의 모습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 닥칠 운명의 날을 알고 있었습니다. 즉,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알고 계셨지만 이를 피하려 하지 않으십니다. 이 고통과 시련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었으며 아버지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입으로는 말하지만, 생활은 오히려 그분의 뜻을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하느님의 일을 세상의 관점으로만 하려고 하니, 특히 자신의 입장에 비추어 말을 하고 있으니 어떻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세상의 관점으로 이야기하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영원한 구원의 입장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대화가 통할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버지의 뜻이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이라는 고통과 시련도 마다하지 않으셨던 예수님. 그렇기 때문에 깊고 진한 부활의 큰 영광을 우리에게 보여주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과연 어떠한가요? 내 삶에 깊이와 진한 향기를 더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간절히 원하고, 갖고 싶고, 기다린 것은 조금 더 늦게 와도 좋겠다(조경란).



어제 수원교구청에 다녀왔습니다. 초라한 인천교구청과 비교되네요.



연애박사가 됩시다.

인터넷에서 본 글인데, 글쎄 이런 사람이 연애를 잘 한다고 하네요. 그 조건은 다음의 다섯 가지입니다.

사과를 잘 쪼개는 사람.
사탕을 끝까지 녹여먹는 사람.
유리창을 닦아본 사람.
찬밥도 맛있게 먹는 사람.
혼자서도 잘 노는 사람.

왜 연애를 잘 할까요? 그 조건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사과를 쪼갤 수 있다는 건, 서로 나눌 줄 안다는 것.
사탕을 녹여먹는다는 건, 기다릴 줄 안다는 것.
유리창을 닦는다는 건, 정성을 들이는 것.
찬밥도 맛있게 먹는다는 건, 사랑이 초라해도 맛있게 소화한다는 것.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딘다는 건, 타인을 배려하고 자기 욕심으로 상대를 만나지 않는다는 것.

처음에는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해설을 들으니 고갯짓을 할 수밖에 없네요. 나누고, 기다리고, 정성을 드리는 모습. 또한 작은 것에도 기쁨을 간직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사랑을 갖춘 사람이 어떻게 연애를 못할 수 있겠습니까?

연애박사를 부러워하기보다, 여러분이 먼저 위의 조건들을 지켜서 연애박사가 직접 되어보면 어떨까요? 특히 내 가족 안에서부터 말입니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