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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3-03-22 조회수653 추천수9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3년 3월 22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If I do not perform my Father's works, do not believe me;
but if I perform them, even if you do not believe me,
believe the works, so that you may realize and understand
that the Father is in me and I am in the Father."
(Jn,10,37-38)

제1독서 예레 20,10-13
복음 요한 10,31-42

신학교를 그만 둔 학생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그러다가 “앞으로 뭘 할 거니?” 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때 이 학생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신부님, 사실 신학교를 그만둔다고 짐을 싸고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나더라고요. 뭐 먹고 살지?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봤어요. 그런데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신학생 때는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을 것 같았는데, 막상 현실이 되니 제 자신이 이 사회에서 그리 필요한 일꾼이 아닌 것입니다. 정말 걱정되어요.”

이 학생과의 만남을 마친 뒤에 제 스스로에게도 질문을 던져봅니다.

‘내가 만약 신부가 아니라면 어떻게 살았을까? 신부가 아니라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주님 덕분에 이렇게 신부가 되어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저입니다. 신부라는 사실 외에는 특별히 내세울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결국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단죄할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그런데 왜 스스로를 낮추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위에 서려고 할까요?

저의 경우를 예를 들었지만,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자기 분야가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런데도 얼마나 많이 사람들을 판단하고 단죄하고 있습니까?

사실 2천 년 전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우리와 다를 바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주님이 아닌 이상 세상의 모든 진리를 알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잣대를 내려놓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이 무조건 틀렸다면서 적의를 품고 돌을 던지려고 합니다.

사실 돌을 던져서 죽인다는 것은 큰 죄인일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잘못하신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한 것? 아니면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 분명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잣대에 눈이 가려서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는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보려하지 말고, 당신께서 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일들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일들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아버지 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일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남을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하는 행동은 이제 버려야 합니다. 이러한 행동이 바로 예수님을 향해 돌을 던지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2천 년 전에 예수님을 향한 그런 불경은 지금 역시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모습을 통해서 계속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과 비교할 때 너무나도 미약하고 부족한 우리라는 것을 잊지 마시고, 좀 더 내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생활을 하는데 최선을 다하도록 합시다.

 

가짐보다 쓰임이 중요하고, 더함보다 나눔이 중요하고, 채움보다 비움이 더욱 중요핟(승효상).



맛 없어 보이죠? 그러나 보이는 것과 달리 아주 맛있답니다.

 


아픔과 상처를 맞이하는 방법

 
컴퓨터로 글을 쓰는 글쟁이들의 실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쓴 원고를 날려 보내는 사고(?)입니다. 물론 원고를 쓰다가 지워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워드프로세서의 ‘되돌리기’ 기능을 이용하면
되니까요. 그러나 이 파일을 다른 곳으로 옮겨서 백업을 시키다가 잘못되어 예전의 파일 위에 덮씌우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예전의 파일이 지금 새롭게 쓴 파일을 덮씌워서 글 쓴 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때에는 참 막막합니다. 어쩔 수 없이 원고를 다시 써야 하니까요.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이렇게 다시 쓴 글이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호평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정말로 술술 풀린다는 말이 나올정도로 쉽게 쓴 글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반응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결국 아픔이 없는 글은 그만큼 내용도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싶네요.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픔도 있고 상처도 있어야 그만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깊은 내용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픔과 상처를 두려워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또 다른 깊은 내용을 만드는구나.’ 라는 생각으로 기쁘게 아픔과 상처를 맞이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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