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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원의 신비를 묵상하는 성주간이 되길/신앙의 해[122]
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03-23 조회수356 추천수0 반대(0) 신고


                                            그림 : [이스라엘] 카나의 혼인잔치 기념성당 외부

어느 시대나 ‘희생양’은 있다.
죄와는 무관하게 사라진 이들은 역사 안에 수없이 많다.
유다인들은 그런 희생양으로 예수님을 선택한다.
그렇지만 모든 것은 주님의 이끄심이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라는 ‘카야파’ 대사제의 말을 되새겨 보라.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다.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요한 11,51-53)’
 

창세기의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사랑에 형제들의 질투로 노예로 팔린다.
그러나 그는 우여곡절 끝에 이집트의 재상이 된다.
이후 요셉은 기근 때문에 이집트에 식량을 구하러 온 자신의 형제들을 맞이하게 되고
이게 하느님께서 분명한 목적을 위하여 자신을 이집트로 보내셨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자신을 죽이려고까지 했던 형제들을 용서하고는 아버지의 후손 모두가
기근으로 굶어 죽지 않고 이집트에 정착하여 편히 살 수 있도록 조치한다.

요셉이 깨달은 것은 이것일 게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형제들보다 먼저 이집트로 보내시어
기근에도 당신 백성이 멸망하지 않고 살아남도록 이끄셨다는 것이다.
형제들의 질투와 증오로 이집트에 팔렸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악의까지도 이용하시어 당신 백성을 살리신 것이다.

그렇다.
인간의 악은 조화와 질서를 파괴하지만,
하느님의 섭리는 그것마저도 이용하여 선으로 이끈다.
예수님 시대의 그 백성의 지도자들의 모습 또한
의회를 소집하여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는 파괴자다.

역설적으로 이 결의는 카야파 대사제의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라는 말로 이루어진 것이다.
결국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들의 악의에 앞서 하느님의 섭리에 따른 것이리라.
하느님은진흙탕과 같은 인간들의 죄악에서도 구원을 베푸는 분이시다. 
 

우리 역시 살다 보면 희생양이 될 때가 있다.
그러나 그걸 불평하지 말아야 할 게다. 받아들이려 애써야 하리라.
그것이 예수님을 닮는 모습이기에. 그 희생은 은총으로 되돌아오기에.
하느님은 상상도 못할 ‘반전’을 만나게 해 주신다.
당신의 부활을 우리가 체험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희생은 언제나 또 다른 축복이 된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더 낫다.”
당시의 대사제였던 카야파의 말이다.
그 한 사람이 정녕 누구인 줄 알았다면 이렇게 말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였을 것이다.
겉으로는 논리적으로 보이는 이 말에는 함정이 있다. 속임수이다.
오늘날에도 이런 걸 빙자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있는지?
가장 큰 희생자는 바로 예수님이셨다. 
 

아직 예수님의 부활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하고 있다면
예수님의 수난과 그 고통 그리고 십자가의 큰 의미를 더욱 깊이 묵상하는
내일 부터의 성주간에 정성을 다해야겠다.
성주간을 의미 있게 보내려면 역시 파스카 삼일의 전례 참여일 게다.
물론 주님 만찬 성목요일과 주님 수난 성금요일의 전례 참여는
교회법적인 구속력을 갖고 있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전례의 정점인 파스카 삼일을 거룩하게 전례에 참여하는 것은
법적인 의무를 떠나 우리 신앙인의 기본자세이리라.
 

신앙의 해다.
이제 한 주간 뒤에 맞이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이
그를 믿고 따르는 우리의 부활이 되도록,
그분의 십자가와 함께 구원의 신비를 묵상하는 성주간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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