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작성자조재형 쪽지 캡슐 작성일2013-03-24 조회수366 추천수5 반대(0)


오늘은 주님의 수난 여정에 함께 했던 사람들을 묵상하고 싶습니다.
먼저 예수님을 마음 아프게 한 사람들입니다.
1) 유다.
한 자매님께서 주님의 최후의 만찬을 묵상하면서 한 시간 동안 눈물을 흘렸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이제 이 저녁이 주님과 함께하는 마지막 식사라는 생각에, 주님께서 주셨던 그 많은 가르침과 주님께서 사랑해 주셨던 그 순간들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오늘 이 식사가 마지막이라는 그 느낌이 오면서 그렇게 눈물이 났다고 합니다. “저는 아니겠지요?”라는 제자의 말이 또한 가슴을 치게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많은 경우에 배반은 절친했던 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을 봅니다. 많은 것을 나누었던 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을 봅니다. 본당에서도 보면 그렇습니다. 단체의 간부들끼리도 없는 자리에서는 상대방의 흉을 보기도 합니다. 이런 배반은 사제/ 수녀/ 평신도 모두에게서 나타나곤 합니다. 저는 교구에 있을 때 때로 본당에서 ‘투서’를 보내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본당 신부님의 잘못을 지적하고, 본당 신부님을 비난하는 그 사람은 사실 본당 신부님과 늘 가까운 자리에 함께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저 역시도 예수님을 팔아 넘겼던 그 유다와 비교해서 “나는 아니죠!”라고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2) 베드로
한 형제님은 늘 자신을 베드로의 입장에 놓고 묵상을 했습니다. 자기는 늘 모범생이었고, 남들에게 칭찬을 많이 받았고, 기도도 공부도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피정을 하는데 늘 먼 가 부족하고 마음이 열리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하는 베드로를 묵상하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이익과 자신의 입장을 먼저 생각한 일들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주님께서는 늘 나와 함께 계셨는데, 나는 주님이 힘들어하실 때, 주님께서 함께 기도하자고 하실 때, 어쩌면 늘 주님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봅니다.

3) 안나스, 가야파, 헤로데, 빌라도
예수님을 고발하고,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게 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많은 권한과 능력을 갖고 있었고, 사회적으로 지도층에 있었으며, 많이 배웠던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박해하고, 예수님을 죽음에로 몰고 갔습니다.

미국이란 세계 최강의 나라는 힘없는 나라와 전쟁놀이를 하였습니다. 전쟁을 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대화와 타협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고 힘에 의해서 해결하려했습니다. 그전에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노예로 팔아먹었으며, 아메리카의 주민들을 무참하게 죽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와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외국인이란 이유로 노동현장에서 무시 받고,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통계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세계 경제의 80%이상은 10%도 안 되는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수 억 명 이상이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의 동포인 북한에서도 수많은 어린이들이 영양실조로 발육 부진을 겪고 있으며 수많은 아이들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들 모두에게 이렇게 물어 오실지 모릅니다. “너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4) 군중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실 때 겉옷을 벗어서 환영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새로운 가르침에 감격하고, 하느님 나라가 다가올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회개의 세례를 받으려고 요르단 강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예수님이 가는 길가에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바라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초라하게 유대인의 법정에 설 때 군중들은 예수님을 향해 조소와 야유를 보냈으며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야기를 생각해 봅니다. 사제도, 레위인도, 율법학자도 지금 아파서 죽어가는, 피를 흘리며 간절히 도움을 청하는 그 사람을 외면하였습니다. 같은 동족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이 그 사람을 데리고 여관으로 갔고, 치료를 했으며 벗이 되어 주었습니다.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꽃동네는 없어져야 한다.”구요. 그렇게 꽃동네가 커지게 된 것은 어쩌면 우리들의 무관심과 우리들의 외면 때문이라고 이야길 했습니다. 어쩌면 오웅진 신부님과 꽃동네 가족들이 지금 병들어 버려진 사람들에게 벗이 되어준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 하실지 모릅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행복하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너희도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5) 십자가에 매달린 다른 사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렸던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그 죽음의 문턱에서 예수님께 자비를 구하였고, 그 사람은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으로 가리라.”는 위로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은 죽음의 문턱에서 예수님을 조롱하였고, 어쩌면 마지막 기회가 될지 모를 그 구원의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말았습니다.

교도소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지은 죄의 값을 치르고 있습니다. 저는 예전에 아는 사람이 서울구치소에 있었기 때문에 잠시 면회를 간적이 있습니다. 구치소를 처음 들어갔기 때문이지 조금 무섭기도 했고, 몇 개의 문을 지나면서 구치소 안에 있는 그 친구가 걱정되기도 했습니다. 잠시 유혹에 빠져서 그만 죄를 지었는데 부모님과 그 친구의 아내는 매일 면회를 가셨습니다.

교정 사목을 담당하는 신부님이 저와 동창 신부이기 때문에 특별면회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함께 커피를 마시면서 잠시 얼굴을 쳐다보았는데 무척 담담해 보였고, 자신의 죄를 솔직히 인정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아직 종교가 없기 때문에 가능하면 종교행사에 나가라고 이야길 하고 돌아왔습니다. 나중에 재판을 받고 다행히 집행유예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전화위복’이란 말처럼 공부를 하면서 잘못을 뉘우치고 열심히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교도소에서 말 그대로 교화나 교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쁜 방법을 배우기도 하고, 나와서도 사회에 적응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또 다시 잘못을 범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이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고 진심으로 뉘우치지 못하고 사회를, 가족을, 친구를 원망하면서 신세를 한탄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꼭 다른 사람에게 핑계를 대는 사람을 봅니다. 나는 나의 삶 속에서 나의 잘못을 인정하기 보다는 나의 환경과 나의 주변에 핑계를 댄 적은 없는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오늘은 주님의 수난 여정을 묵상하면서 과연 나는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 주님께 위로를 드렸는지 돌아봅니다. 내일은 주님께 위로를 드린 사람들을 묵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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