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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아낌없이 내어 주는 마리아의 모습으로/신앙의 해[124]
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03-25 조회수434 추천수1 반대(0) 신고


                                                                 그림 : [이스라엘] 코라진 유적지

사람은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산다.
그래서 우리 인간을 관계적 존재라고 하는 모양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다른 이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애쓰는 가운데 조금씩 깊어질 게다.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마음과 하나가 되려는 것이리라. 성주간이다.
우리 또한 라자로의 동생 마리아처럼, ‘친구’를 살리시고자 죽음을 각오하신
예수님을 온전히 섬기며 그분의 수난과 죽음의 신비를 깊이 묵상해 보자.

예수님은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셨다.
그곳에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킨 라자로가 살고 있다.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고 마르타는 시중을 열심히 들었다.
라자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끼어 있었다. 
 

그런데 라자로의 동생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했다.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라고 핀잔을 주었다.
예수님은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그에게 이르셨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많은 유다인들의 무리가 몰려왔다.
예수님 때문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도 보려는 것일 게다.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도 죽이기로 결의한다.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리라.
 

파스카 축제 엿새 전의 베타니아에서의 이야기에서
죽음과 부활, 섬기는 것과 섬김을 받는 게 상반되게 묘사된다.
첫 번째는 죽음과 부활의 대조이다.
죽었던 라자로를 살리신 예수님을 환영하는 잔치가 벌어졌고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닦아 드린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당신의 ‘장례’를 위한 것이란다.

사실 라자로를 살리신 직후 최고 의회에서는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다.
라자로를 살리신 것이 오히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죽음과 상반되는 부활, 아니 부활과 상반된 죽음이다.

두 번째는 섬기는 것과 섬김을 받는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발을 씻기는 장면이 두 번 나온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어 주시고
또 다른 건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리는 거다.
예수님은 돌아가실 때가 되자 손수 제자들의 발을 손으로 몸소 씻겨 주셨다.
그러나 제자들 가운데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린 이는 없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을 예감하고
예수님의 발을 비싼 향유로 바르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린다.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극진하게 섬기는 이런 모습은 복음 어디에도 없는 것 같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신비에 참으로 깊이 동참하고 있는 게다.
섬김의 예수님과 이처럼 섬김 받은 예수님이시다.

라자로의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과 맺었던 관계를 생각해 보자.
마리아는 아무리 비싼 향유라도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아깝지 않게 여겼다.
예수님과 진정한 사랑으로 맺어졌기 때문이리라.
그녀는 물론 그녀 가족은 예수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그녀 또한 예수님을 이렇게 진정으로 사랑했다.
지금 우리는 마리아보다 덜 받은 그분의 사랑인가? 아마도 덜은 아닐 게다.
모르긴 몰라도 비교도 못할 만큼 한없는 걸 더 받았으리라.

이런 우리가 예수님과 어떠한 관계를 맺으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신앙은 예수님과 만나는 것이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변화되고자 예수님을 만난 것이다. 완전한 자유의지로.
이 만남은 예수님을 닮으려고 할 때 더욱 성숙해진다. 
 

예수님처럼 살려고 할 때 부딪히는 어려움과 고통이 십자가이다.
예수님과 만난 인연 때문에
십자가를 기꺼이 지는 것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일 게다.
우리는 어느 쪽일까?
라자로의 동생 마리아냐, 예수님을 몇 푼 동전으로 넘긴 유다이냐?

신앙의 해를 보내면서 은총을 누릴 성주간을 맞았다.
이 한 주간만이라도 비판적 시각과 따지기를 좋아하는 유다의 모습은 접어야겠다.
그리고 아낌없이 내어 주는 마리아의 모습으로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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