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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소나무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3/27일 성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작성자신미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3-03-27 조회수557 추천수14 반대(0) 신고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2013년3월27일 성주간 수요일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 넘길 것이다.”(마태오26,21)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오2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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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렸을 때부터 복음서에서 가장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12제자 중 예수를 배반한
이스카리옷 유다의 존재였고, 가장 참혹한 저주를 받은 듯 한 그의 삶이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위해서 유다의 삶을 그렇게 의도적으로 이끄셨단 말인가?”
“그렇다면, 유다처럼 불쌍한 존재가 더 이상 있을 수 없지 않은가?”
“모두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어찌 한 인간의 삶을 그토록 비참하게 만드셨단 말인가?”
“구원의 역사를 위해 유다는 하나의 중요한 소모품일 수밖에 없었던가?”
이외에도 여러 의문점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자신을 힘들게 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사실 성서에도 유다에 관한 이야기는 몇 자 되지도 않고,
그저 악한 사람이기에 예수님을 배반한 것처럼 서술되어 있다.

여러분께 오늘 그 의문을 조금은 조심스럽게 풀어드리고자 시도해본다.
하지만, 성서학적이고 역사학적이고 신학적인 상세한 설명은 이야기가 길어지므로 피하고자 한다.
누구나 상식 선에서 이해했으면 하는 부분만 나누고자 한다. (그래도 이야기는 길어질 것 같다.)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남부 유다 출신이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북부 이스라엘에 위치한
갈릴레아 호수의 서쪽에 위치한 갈릴레아 출신이다. 갈릴레아는 지정학적으로 외세의 침략을 자주 받은 곳이기에 이방인과 섞여 사는 환경이었으므로 혼혈의 문제로 남부 유다 사람들에게는 “깨끗한 혈통이 아닌 사람들”로 경멸의 대상이었다. 반면 남부 유다는 여러모로 북부 이스라엘에 비해 비교적 안정되고 교육여건도 좋은 환경이었다 한다. 그러한 남부 출신이 바로 유다였다.
이처럼 유다는 갈릴레아에서 어부로 살던 배우지 못한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을 확률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12제자들 중에서 유다가 맡은 일이 재정을 관리하는 역이라는 것을 보아도 안다. 그리고 예수님께 논리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이 역시 유다라는 것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왜 남부 출신이면서 갈릴레아까지 오게 된 것일까?
갈릴레아에는 앞에 말한 것처럼 외세의 침략이 오랜 세월 동안 이루어진 곳이기에 자연스럽게 몇 개의 저항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세력이 성서에 나오는 열성당원들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이들은 무장세력을 갖추고 로마제국에 저항을 하던 세력이다. 따라서 이스카리옷 유다는 남부 유다 지방에 속해있던 열성당원이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성서학자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럽다.
그리고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님께 선택되어 제자가 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 그러면 간략하게 지금까지 이야기 한 내용을 토대로 그림을 하나 그려보자.

유다는 배운 사람이었다. 자기 민족이 외세에 침략을 당하고 있는 것에 민감한 울분을 느끼던 사람이었다. 당시 로마의 식민지로 살고 있던 조국에 대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마음이 강했기에 열성당원이 된다.
열성당의 본거지는 갈릴레아였다. 그래서 그는 갈릴레아로 올라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소문이 돌고 있다. 어떤 사람이 나타났는데 지금까지의 예언자들 하고는 전혀 다른 새로운 예언자라는
것이다. 자유를 이야기하고 억압받은 자들의 해방을 이야기하며, 여러 가지 이적조차 보인다는 소문이었다.
유다는 생각한다.
“설마 그런 사람이 나타나다니? 그렇다면, 외세로 억압받고 있는 이 민족을 구원할 수 있는
뛰어난 지도자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분이 나타난다는 곳을 찾아가 그분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핀다. 그리고 결심한다.
“선생님, 저를 당신의 제자로 삼아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를 제자로 받아주신다. 그분과의 삶이 시작된다. 모든 것을 그분께 걸고 따라가겠다고 결심한다. 그분에 의해서 온 민족이 봉기를 하고 외세를 이 땅으로부터 쫓아낼 것을 기대하며 희망에 부푼다.

시간이 흐른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선생님의 입에서 이상한 말씀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원수를 사랑하라. 왼뺨을 맞거든 오른뺨을 내놓아라.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를 가주어라.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꾸려는 이의 청을 거절하지 마라.”(마태오5,39-42)
그뿐인가?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마르코9,31)라는 알아 들을 수도 없는 말씀마저 하신다.

분명한 것은 유다가 기대했던 말씀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걸고 따라가고자 했던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자신이 지금까지 생각해온 민족을 위해 걸으려 했던 길과 정반대의 말이었다. 민족을 계몽해서 로마 제국을 물리치는 것이 아닌, 오히려 더욱 로마의 사슬에 묶여 지내라는 말로 들린다.

오늘 복음에서는 유다가 은화 서른 닢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 넘기는 것처럼 나온다. 하지만,
은화 서른 닢이라는 것이 자신의 선생을 팔아 넘길 정도의 큰돈일 수는 없다.

결국 그가 예수를 배신한 이유는 자신의 믿음이 깨진 아픔이었다.
유다는 자신이 예수에게 배신을 당했다고 느꼈을 지도 모른다.
차라리 이런 사람은 민족해방에 장애가 된다는 확신까지 하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따라서 하루빨리 제거해야 할 존재라고 느꼈을 지도 모른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을 수 있었다.
운명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결국 잘못된 선택을 하고 만 것이다.

나는 유다를 묵상할 때마다, 우리의 잘못된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 판단을 불러오며,
그러한 판단이 하느님을 죽이는 죄에까지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제대로 알아야 한다. 특히 옳고 그름에 대한 지식은 정말로 제대로 알아야만 한다.
우리 역시 자신이 옳다고 믿는 거짓 때문에 자신을 파멸시킬 수 있음을 늘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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