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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꽃동네 16. 가난한 영성의 탈을 쓴 도둑 심보 [모래성]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3-03-27 조회수399 추천수0 반대(0) 신고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제자들 가운데 하나로서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요한 12, 3 - 6)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마태 26, 1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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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때나, 지금의 때나, 사람은 보잘것 없는 다른 타인을 향한 사랑과 자기 자신을 위한 돈(이윤, 사업) 앞에서는 예수님의 사랑은 저버리고 결국 자기 공동체를 위한 이윤 추구에 목숨을 건다고 할 수 있다.

이윤을 추구한다는 것은 기업체의 특징이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듯이 그러하다.

명분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다고 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가난해 지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가난한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자기 자신은 더 가난해 져야 한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을 가장 우선에 둘 때에 실천되어 진다.

하지만 자신이 가난의 영성을 버린다면 보잘것 없는 사람들에게 향한 '예수님의 사랑' 보다는 이윤을 더 우선의 자리에 둔다. 자기가 부유해 져야 사랑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인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윤을 따져 먼저 부유해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사랑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

그래서 이윤을 계산하여 자신이 부유해 지면 보잘것 없는 사람을 사랑할 것이다는 마음은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다. 유다 처럼 이러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닌 것이다.

단숨에 말한다면, 정말 도둑 심보이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신이 더 철저하게 가난해 져야만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랑의 실천을 진정으로 행동할 수가 있다. 이윤 계산을 하지 말고 당장 이윤이 없더라도 (남지 않더라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이윤을 계산하지 않는 자신부터의 가난의 실천인 것이다.

여기에는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삶이 당연시 요청되어진다.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이윤(돈)을 먼저 따지는 부유한 공동체(상기의 개인처럼)가 되려 한다면 결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랑의 실천을 하지 못한다. 그 마음이 벌써 도둑 심보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먼저 부자가 되고나면 가난한 이들을 돕겠다는 마음은 정작 보잘것 없는 이들에게 먼저 관심이 있어서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먼저 더 많은 관심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다는 이윤 계산이 바로 도둑 심보인 것이다.

이는 인간 개인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공동체도 그렇게 되어진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다며 이윤 우선 추구의 그런 규정들과 방침들에 의해서 마치 개인 한 사람이 움직이는게 바로 조직적인 관리 운영의 '한 기업체'가(한 개인이) 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는 자신이 그들보다도 더 가난해져야 한다. 즉, 이윤 추구의 탐욕에서 해방되어지는 가난한 마음 곧 '가난의 영성'이 자기 자신이 되어져야 가난한 이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부자가 되고나서 사랑하겠다는 것은 가난의 영성이 아니다

그런 것은 '가난의 영성'의 탈을 쓴 '도둑 심보'인 것이다. 개인처럼 공동체도 똑같다. 공동체가 이윤을 계산해서 부자가 되어야 가난한 이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가난의 영성의 탈을 쓴 도둑 심보와 같은 것이다. 최귀동옹은 부자이었기 때문에 가난한 이들을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이 결코 아니었다.

최귀동옹에게는 사랑보다도 이윤을 먼저 계산해서 자기보다 못한 거지에게 사랑을 베풀어 줄 수 있었던게 아니다. 아빠도 사람이 거주할 수 없는 '창고방'에서 살면서 매주 하루 노가다 하며 매주 5일간 하늘이를 10년간 보살펴 왔다. 개인(공동체)의 이윤을 먼저 생각하지 않는게 가난한 십자가의 영성이고 그 반대는 유다와 같은 도둑 심보인 것이다.

개인에게 처럼 공동체도 공동체 십자가는 있다. 그러나 기업체가 되면서 공동체는 공동체 십자가를 저버렸다. 예수님의 사랑 보다는 이윤을 추구하면서 삯꾼이 지배하는 기업체로 변질(세속화)해 버린 것이다.

제266대 교황 프란치스코1세는 교황 선출 이후 첫 미사에서 교회의 세속화를 강하게 경계하며 자신의 뿌리로 돌아가야 하며 예수와 십자가라는 기본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시며 “우리는 어디든 갈 수 있고 많은 것을 세울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지 않는다면 교회라기보다는 자비로운 비정부기구에 지나지 않게 된다.” 고 지적하셨습니다. 이어 “십자가 없이 걷고, 십자가 없이 뭔가를 짓고, 십자가 없이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면 우리는 주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세속적인 존재일 뿐”이라며 “세속적인 가치를 앞세워도 교황이 되고, 주교, 사제가 될 수는 있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는 아니게 된다.” “세속적인 가치를 바탕으로 어떤 일을 이룩하려 한다면 어린이가 쌓은 모래성처럼 모두 무너져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 교황님을 중심으로 교회가 근본에로 돌아가 거듭 태어날 수 있기를 희망하며 기도합니다. <반신부님 글 안에서>


유다가 말합니다.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넘겨 주면 어떤 이윤을 먼저 얻을 수 있는가를 공동체는 지금도 계산하고 있다 할 것입니다. 최귀동옹의 사랑실천, 아빠의 사랑실천은 예수님의 가난한 십자가 사랑이었습니다.그러나 이윤 계산이 우선 되는 삯꾼이 지배하는 기업체로 변질되어 '예수님의 사랑'은 삯꾼 지배에게 팔아 넘겼다 하겠습니다.

공동체는 회개하여야 합니다. 누구를 위해서 회개해야 하는 것일까요. 바로 버려진 이들의 고통 없는 평화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 공동체는 회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버려진 이들 때문에 - 주님의 은총이 내려지고 있다 것에 돌이켜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참고> 저는 노가다해서 번 돈은 담배값 그 한 종류에만 사용하고 모두 아기의 식이요법에 관련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저는 공동체처럼 입으로만 가난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최귀동 옹처럼 돈을 구걸하기도 하며 철저히 자신(자애심)을 버렸다. (자신을 내어주었다) 하겠습니다. 예수님 앞에 겸손이었습니다.

<참고> 거대한 공동체 안의 시설들에서 어떤 어떤 방을 선별해서 cctv 설치를 못합니다. 버려진 이들의 인간 보호를 먼저 우선시 한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약보다도 독이 된다하여 (증거 기록이 된다 하여) 예수님의 사랑보다도 이윤을 먼저 우선시 계산한다면 기업체에 불과하다(세속화)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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