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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 형제들 - 2013.4.1 부활 팔일 축제 내 월요일,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3-04-01 조회수336 추천수3 반대(0) 신고

2013.4.1 부활 팔일 축제 내 월요일 사도2,14.22-33 마태28,8-15

 

 

 


내 형제들

 


오늘은 복음 말씀 중 ‘내 형제들’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아침 조간신문 1면을 보는 순간
‘일반고(一般高) 슬럼화 진행 중…숫자로 드러났다.’라는 
활자가 한 눈 들어왔습니다.

 

날로 극심해지는 빈부의 격차가
교육현장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우려감이 덮쳐왔습니다.

공부 못하고 돈 없는 학생들은 정말 있을 자리가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는 지난 밤 9시경, ‘내 형제들’에 대한 복음 묵상하던 중

뜻밖에 한 젊은이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저는 행려자가 아닙니다.

  지나다가 문이 열려 있어 수도원에 들어왔습니다.
  부모도 없고 집도 없습니다.
  친척과 하나뿐인 여동생과 연락이 끊어진지도 오래됩니다.
  공고를 졸업했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삽니다.
  오늘은 일요일이라 노동을 못했습니다.
  잠은 찜질방에서 8000원 주고 잡니다.
  수중에는 몇 천원의 돈만 있습니다.”

행려자가 아니라 강변했지만 현실의 지친 모습은 그대로 행려자였습니다.

참 아슬아슬하고 위태하게 살아가는,
행려자의 경계선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많은 오늘의 불안한 현실입니다.

집 없고 직장 없고 돈 없으면 행려자이기 때문입니다.
행려자와 일반인의 사이가 백지장 차이처럼 느껴졌습니다.

수도원에 살다 나가 적응 못하면
그대로 행려자가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젊은 형제와 대화를 나누며 떠오른 마태25,40절의 주님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주님의 형제들이 누구입니까?

오늘 복음의 주님의 제자들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이들은 물론이고
바로 위의 가장 작은이들이, 즉 구체적 몸의 곤궁 중에 있는 굶주린 이들,
목마른 이들, 나그네들, 헐벗은 이들, 병든 이들, 감옥에 있는 이들 모두가
주님의 작은 형제들입니다.


그러니 어제 방문했던 젊은이도 주님의 작은 형제임이 분명합니다.

집무실에 들어오면서
우선 먹을 물 한 잔을 청했던 지치고 가난한 형제였습니다.

오늘 부활하신 주님은

하늘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갈릴레아 현장의 당신 형제들을 찾았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자리는
주님의 형제들의 공동체인 내 삶의 현장 갈릴래아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이나 믿는 우리들뿐 아니라
넓은 의미로는 모두가 주님의 형제들입니다.

수직구조 위에서 군림하거나 지배하는 주님이 아니라
수평구조의 중심에 자리 잡고 계신 만민의 형제인 주님이십니다.

 

이런 주님을 그대로 본받은 이가 성 프란치스꼬요,
20세기 걸출한 성자 샤를로 후꼬입니다.

사람은 물론 모든 피조물을 주님의 형제로 믿어 복음을 선포했던
성 프란치스코요, 만민을 형제로 섬기다가 순교한 샤를로 후꼬입니다.

 

특히 프란치스코 교황의 배출은 시대의 징표처럼 느껴집니다.

형제적 사랑의 공동체의 복원만이
혼란에 빠진 현대를 구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활한 주님을 만날 자리는 우리 삶의 현장입니다.

주님 부활을 체험해야 비관론적 운명론에서 해방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사후 두 반응이 흥미롭습니다.

 

하나는 예수 부활을 주장하는 반응이요,
하나는 매수된 경비병들이 전했던 것처럼
제자들이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다는 반응일 것입니다.

 

주님 부활을 체험하지 못했다면 현실적으로 후자의 반응에 공감하고
예수 부활은 유언비어처럼 여기게 될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 부활을 의심했던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님 부활 사건을 유언비어처럼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부활을 체험함으로
돌변한 베드로의 설교가 바로 오늘 1독서 사도행전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가 주님 부활을 담대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또 복음의 예수님 부활을 체험한 여자들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갑니다.

예수님 부활은 사변이 아니라 체험이요, 증거가 아니라 선포입니다.

주님 부활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주님 형제들 가운데 계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 믿은 이들뿐 아니라 주변의 모든 이들,
특히 곤궁 중에 있는 이들이 주님의 형제들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형제들을 무시하는 것은 그대로 주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 형제들인 제자들을 추호도 무시하지 않았고
오히려 사랑으로 섬겼습니다.

주님의 형제들에 대한 우선적인 자세가 존중과 배려요
서로의 짐을 나눠지는 것입니다.

이래야 이들 안에 현존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납니다.

 

‘우리 존엄을 훼손하면 개성공단을 폐쇄하겠다.’는
북한의 말도 경청해야 할 것입니다.

개인뿐 아니라 국가도 아무리 가난하고 약하고 작아도
존중 받고 배려 받아야 함을 절감합니다.

 

또 하나는 서로의 짐을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의 형제적 공동체입니다.

살다보면 짐이 되는 형제들도 생기기 마련입니다.

무거운 짐과도 같은
치매 노부모를 돌보는 이들 역시 주님의 형제들 돌보는 것입니다.

아무리 치매 노인도 요양병원에 가면
버림받았다는 마음의 상처로 오래 살지 못한다 합니다.

 

간혹 무거운 짐에도 불구하고
치매 노부모를 돌보는 이들을 대할 때마다 경외심을 갖게 됩니다.

 

12년 동안 헌신적으로 공동체를 섬기다가
3.31일 부활 대축일로 퇴임하신 아빠스님의 모습도 많은 가르침을 줍니다.

 

주님 부활과 더불어 퇴임하셨으니 부활의 삶을 살게 되셨음을 뜻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갈릴래아 당신 형제들의 공동체로 돌아가신 것처럼
이제 아빠스님도 주님의 형제들 한 가운데서 부활의 삶을 사시게 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를 만나 주시고 주님의 형제들의 삶의 현장으로 파견하시어
또 부활하신 당신을 만나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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