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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당신의 형제들에게 사랑의 불꽃으로 지피시다 [사랑의 백색순교]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3-04-02 조회수303 추천수0 반대(0) 신고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루카 24, 13 -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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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처음에 참으로 고통과 멸시 속에서 10년을 침묵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십자가의 삶으로 살았습니다.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지도자들이 많은 규정들과 방침들을 만들어 내면서부터 '사랑'은 점차 예수님처럼 버려져 갔습니다.군중들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사랑을 보며 '호산나'하고 환호(방송)하기도 했지만 지도자들은 마침내 예수님의 사랑을 없애는데 결의를 하였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향해 가시듯이 '아빠'도 십자가의 삶 속에서 십자가를 향하여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군사 하나가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렸던 것처럼, 학대하는 삯꾼 하나에게서 '아빠'의 가슴도 창에 찔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덤에 묻히시고 부활하셨으며 '아빠'도 무덤에 묻히고 사랑으로 부활해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와 별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아빠는 '믿음의 특권'으로 '고통의 특권'을 거치고 이제 십자가의 백색 순교로 '영광의 특권'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 때문에' 멸시를 받았고, 지도자들에게 속한 군중들은 예수님 대신에 바라빠를 선택하였습니다. '사랑은 복되시어라' 대신에 '거친 삯꾼'을 원하였던 것입니다. 십자가에서는 자칭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는 팻말을 달아라며 사랑을 조롱하기까지 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이신 예수님의 사랑이 고난을 받고 영광에 이르는 좁은 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사랑의 순교로 영광 속으로 들어가는 모든 다른 이들의 본보기인 것입니다. 사랑의 죽음은 사랑의 순교로 이어져 가는 '그리스도의 사람'에게 사명이 부여되어지는 좁은 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통하여 죽음에서 사랑이 부활하였기 때문입니다. 인간 안에 뿌리내려진 악에 대항하고 고통에 대항하며 죄의 죽음과 싸우는 이같은 그리스도적인 고통의 특권에는 영광의 특권이 마련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보름지기 사랑은 죽음으로써 패배한다는 상실감은 '사랑의 무덤'에 정지되어 악과 고통과 죄의 죽음에서 머무르는 삶, 무덤에서 침묵하는 '무덤의 삶'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상실감에서 생겨나는 고통이며 사랑 때문에 받게되는 고통(사랑의 고통)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덤 주위에서 머무르는 마리아에게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는 음성은 부드럽지만 강력한 '영적인 부르심'입니다. 

육적으로 뻣뻣한 사랑이 아니라, 영적으로 부드러운 사랑에로 이끄시는, 예수님의 부르심입니다. "마리아야" 하며 이름을 부르심은, [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요한 10, 3 - 4 참조) ]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장 서 가십니다. 그리고 영적인 사랑에로 부르심을 들은 예수님의 양들은 (예수님의 참된 형제들은) 육적인 침묵으로부터 - 영적인 부르심을 알고 예수님의 목소리, '예수님의 사랑'을 가리키는데, 곧 '예수님의 사랑'을 따릅니다.양들은 그분의 사랑이 바로 진리의 목소리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랑의 말씀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침묵의 죽음에 그대로 머무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영적인 부르심은 부드럽지만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처럼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입니다.빵을 떼어 주신다는 것은 성체를 가리키시지만 여기서는 특히 <참으로 보잘것 없는 버려진 이들>을 바로 예수님의 성체로 여겨심을 지시합니다. 가장 보잘것 없는 한 사람에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당신과 동일시 하시는 빵(성체)를 모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는 영적인 부르심입니다.사랑의 불꽃인 것입니다

버려진 이들의 고통에 결합하는 것이 빵을 모심입니다. 그러면 그 고통의 세계에서 그리스도적 고통으로 비로소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사랑 때문에 겪는 고통에 자기 자신의 고통으로 결합하지 않고서는 결코 예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의 고통에 함께 하는 것이 '잃어버린 사랑'을 발견하는 고통의 특권, 영광의 불꽃이다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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