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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시작했으면 끝을 보아라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3-04-02 조회수824 추천수14 반대(0) 신고



2013년 다해 부활 팔부축제 내 수요일


<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복음: 루카 24,13-35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다


PIERO della FRANCESCA 작, (1463-65)


     < 시작했으면 끝을 보아라 >

           저는 송탄성당 출신 사제입니다. 명절 때마다 송탄성당 출신 사제들이 고향이 모여 옛 이야기들을 나누곤 합니다. 지난 설 때도 만나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던 중 제가 초등학교 때 담배를 펴 보았다고 했더니 믿지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냥 입담배(목으로 연기를 넘기지 않고 입으로만 빨았다가 내뱉는 것)나 호기심으로 펴 본 것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 도너츠(담배 연기로 도너츠 모양을 만들어 연속으로 내뱉는 것)까지 만들 줄 알았다고 했더니 믿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담배를 하나 붙여서 도너츠 묘기(?)를 선보여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모두들 놀랐습니다.

물론 저는 초등학교 때 그 며칠 펴 본 것을 제외하고는 담배를 피워본 적이 없습니다. 보통은 군대에서 힘이 들어서 많이 피우게 되는데 저에게도 담배를 권하는 선임이 있었습니다. 저는 담배를 안 피우겠다고 했는데, 선임이 피우라는데 거부했다고 하며 한 달 내에 피우게 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즉 군대용어로 갈굼을 당하면 결국엔 피게 될 것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 선임은 제대 할 때까지 저를 싫어했지만, 저는 맞을 각오를 하고 끝까지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되었지만 피워보았고, 군대에서는 피우면 편했을 텐데 끝까지 피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저도 참 고집이 있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온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성격이 크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내 인생이 다른 누구 때문에 좌지우지 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초등학교 때 피워보고 별로 이롭지도 않은 담배를 뭐하러들 피우나?’라는 마음을 갖지 않았다면, 군대에서 선임의 괴롭힘을 피하기 위해 피우게 되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담배가 백해무익 하다는 것을 몸으로 느껴보았기 때문에 또 그만큼 안 피우는 데도 고집스러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누군가가 무언가를 고치고 싶어 하지만 잘 안 될 때는 그것 때문에 고민하지 말고 그 안 좋은 것이 정말 안 좋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낄 때까지 해 보라고 권하기도 합니다. 술을 끊고 싶다면 술이 얼마나 안 좋은지 알아야 합니다. 저도 술로 많은 실수를 해 본 후에야 지나치면 나만 고생이라는 것을 깨닫고 사제가 되어서는 과음을 절제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차례 끊어보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고, 지금은 다시 마시기는 하지만 예전에 술 때문에 고생한 것을 몸이 기억하고 있기에 즐길 정도만 마십니다.

무언가를 해 보려거든 다시 되돌아 올 수 있는 한계 내에서 끝까지 가 보는 것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다시 돌아왔을 때 아무 문제가 없는 구 수준까지만 가 보십시오. 왜냐하면 그 끝을 보지 못하면 되돌아 설 때 항상 미련이 남기 때문입니다.

사실 누가 어떤 길을 가다가 되돌아 올 때는 그 길이 맞나 틀리나를 고민할 때가 아닙니다. 틀렸다는 확신이 섰을 때 다시 돌아서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맞는지 틀리는지 모를 때는 갔다가 왔다가를 반복할 뿐 한 길을 선택해서 되돌아오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밥을 매일 먹고 잠을 매일 자는 이유는 그래야 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머리로 알기 때문이 아니라 온 몸으로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아기가 뜨거운 것에 손을 대려 할 때 말로 해서 안 들으면 손을 살짝 대게 해서 뜨거움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 상책입니다. 온 몸으로 알아야 비로소 알게 되고 변하게 됩니다. 산을 오를 때 길을 잃었거든 정상까지 가 보십시오. 그렇게 그 산이 틀린 줄 알아야 우왕좌왕 하지 않고 다른 산까지 앞만 보며 곧바로 갈 수 있습니다.

 

오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무엇이 옳은지 깊이 체험할 수 있는 꾸준함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분명히 여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하는데도 그것에 대해 더 알아보지도 않고 그냥 실망하여 고향으로 내려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성경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연구해 보려고 노력했다면 그 여인들의 말을 믿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끈기가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고는 했지만 끝을 낼 줄은 모르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당을 떠나는 사람들은 가톨릭 신앙에 대해 갈 때까지 가보고 혹은 공부해보고 가톨릭 신앙을 떠나는 것일까요, 아니면 조금 다녀보고 특별히 느껴지는 것이 없어서 금방 포기하고 마는 것일까요? 갈 때까지 가본다는 마음으로 신앙을 시작한 사람들은 결코 교회를 떠날 수 없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이 율법서와 예언서, 그 밖의 성경 전체를 다만 길에서나마 가슴 뜨겁게 배우지 않았다면 그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알아 뵈올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심장)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그렇습니다. 지금까지는 성경을 읽어도 가슴이 뜨거워 질 때까지는 배워보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를 하더라도 끝장을 보겠다는 마음이 없으면 항상 이도저도 아닌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도 대단히 위대한 성인이지만 그 전에는 마니교의 교주가 될 정도로 이단에 심취해 있었고 아들과 부인이 있었을 뿐 아니라 삶 자체도 매우 문란하였습니다. 이는 프란치스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당신들이 그렇게 살아온 것이 당신들을 망치고 있음을 가슴 뜨겁게 체험한 분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틀렸다고 생각 할 때는 오늘의 엠마오 제자들처럼 바로 길을 바꿀 줄 아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전의 삶으로는 절대 돌아가지 않는 분들입니다.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에서 남자 애벌레는 여자 애벌레를 만나 올라가던 중간에서 내려옵니다. 그러나 이내 버티지 못하고 여자 애벌레와 헤어집니다. 왜냐하면 그 정상에 대한 미련이 나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끝까지 올라가보고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아쉬움 없이 내려와 나비가 될 것을 결심합니다.

이것이다 싶으면 온 몸으로 자신을 내던질 줄 아는 사람들이 큰일을 해 낼 수 있습니다. 벽에 부딪혀 보아야 더 이상은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무엇이든 시작하기로 결심했다면 심장이 타오를 정도의 열정을 지닐 줄 알아야겠습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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