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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슬퍼 우는 곳에 예수님께서 완고함을 꾸짖으시다 [최후의 명령]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3-04-06 조회수306 추천수1 반대(0) 신고

하느님의 뜻에 맞는 슬픔은 회개를 자아내어 구원에 이르게하므로 후회할 일이 없습니다그러나 현세적 슬픔은 죽음을 가져올 뿐입니다. (2코린토 7, 10)

‘참회’는 내적인 특성 깊이 초점을 맞춘 참회, 죄의 용서를 동반하는 내적 쇄신을 가리킨다. 우리는 회개를 통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우리가 올바른 마음과 참된 신앙을 가지고 슬픔과 참회를 하는 한, 성체성사 거행에서 기념되는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는 우리가 계속 화해하도록 해 주며 죄의 용서를 가져다준다. <출처 ; 전례사전>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커스로 가는 도중에 주님을 뵙고 회개하는데 이 회개의 과정은 죄에서 돌아선다는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사실 바오로의 삶은 죄와는 거리가 먼 삶이었습니다. 율법에 대한 열성과 흠 없음을 간직하던 사람이 바오로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표현대로 유익한 것이었고 자랑할 만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소중한 것들을 주님과의 특별한 만남 후 포기합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가꾸어 왔던 일상의 삶이 죄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깨닫게 된 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장해물이었기에 포기하는 것입니다. 「더 가치로운 삶」을 위해 지금까지의 삶을 포기함이 바오로의 회개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바오로 사도의 회개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참회나 십자가 오른편에 달린 강도의 후회와도 다른 것이고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베드로의 눈물과도 분명 차이가 납니다.

예에서 보지만 이들의 회개는 「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에 눈물과 움추림입니다만 바오로 사도의 회개는 「지금까지의 일상의 삶」과 「가치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에 그 결과는 「깨달음과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러한 바오로 사도의 회개가 바로 우리 신앙인들이 가슴 깊이 간직해야할 회개의 또 다른 면인 것입니다 내가 깨달은 진정 가치 있는 삶을 방해하는 모든 것 죄 뿐만이 아니라 나의 평범한 일상의 삶마저도 그것이 장해물이라면 매 순간 과감히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가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회개의 삶이 아니겠는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출처; 가톨릭신문, 홍금표신부>


슬퍼하며 울고 있는 곳으로 가서... 그 여자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제자들은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마르코 16, 9 - 15 참조)

제자들은 슬퍼하며 그리고 참으로 참회하여야 진정한 새로운 가치의 몫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사랑의 상실에 따른 육적인 메마름의 '첫번째 무덤의 삶'에서 사랑의 부활에 따르지 못하는 영적인 메마름의 '두번째 무덤의 삶'으로부터 벗어나 해방되어야 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였다.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요한 21, 3 참조)

육적인 감흥에 맛들여진 '일상의 삶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진정한 참회가 아닌 것입니다. 제자들은(공동체는) 후회에 따른 슬픔을 '일상의 삶을 통해서' 이를 없애보고자 했겠지만 결코 아무 것도 잡지 못하는 무의미한 현세적인 작업이었습니다.이와같이 현세적 상심에서 일어나는 슬픔, 그 외에 십자가에 사랑을 매달은 내재된 죄악성 등은 새로운 가치의 진정한 몫을 다시 얻을 수 있는 힘이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형제회, 공동체 제자들의 육적이고 현세적인 삶(일)이란 이미 이러한 삶(일)들에 익숙해져서 악을 악으로볼 수 없고 죄를 죄로 여기지 않음으로해서 악의 고통과 죄의 죽음을 한낱 일상의 한 부분으로 치부해 버리는 세속화되어진 모든 일들을 가리킵니다. 거기에서는 예수의 공동체가 참으로 바오로 사도와 같이 참회할 것들이 요청되어 집니다.
 
제자들은 육적이고 현세적인 일들의 감흥에서 벗어나야 합니다.버려진 이들의 고통이 아직 남아 있는데도 '세상의 도식'에 빠져있고, 육적인 여러가지 온갖 감흥들에 맛들여져서 버려진 이들의 '고통없이 살고자 하는 행복의 염원'을 등한시한다는 것은, 사랑을 포기한 것에 불과 할 뿐입니다.

예수의 공동체 형제들에게서 참으로 포기하여야 하는 사랑의 몫(일)이 아닙니다. 버려진 이들의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행복한 삶과 제자들 자신 역시 [ 진정 가치 있는 삶을 방해하는 모든 것, 죄 뿐만이 아니라 나의 평범한 일상의 삶마저도 그것이 장해물이라면 매 순간 과감히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 ]가 "자기를 버리는" 참된 포기인 것입니다.

성체성사적인 삶으로 변화는 자신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렇다고 '나 홀로 수덕주의'로 자신을 버리는데에만 전 인생을 보낼 수는 없습니다. 자기를 버리는 데에는 <버려진 이들에게 자신을 내어 줄 때에만> 자기를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육적인 감흥에 젖어있고, 현세적인 일(사업)에만 열중하며, 버려진 이들의 고통에는 등한시한 채 '나 홀로 수덕주의'에 빠져있는 <일상의 삶에서> 얻을 수 있는 몫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세속화에 따른 모래성"(프란치스코 교황님)일 뿐입니다.공동체도 그리고 자신들이 포기해야 될 것, 자신을 버려야 할 것을 찾지 못하는 것은 영적인 메마름의 영적인 나태에서 기인합니다.  

사람이나 공동체나 <자기 버림은 자기를 내어 줄 때에만> 자기 포기에로 이르게 됩니다. 산 속에서 스님처럼 도를 닦아서 자기를 버리는게 아닌, 예수님과 같이 사랑의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 줄 때에만 자기를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체성사적인 삶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랑의 부활로 이루어지는 '성체성사적인 삶'이 새로운 가치의 진정한 몫입니다. 버려진 이들의 고통에 결합하지 못하고서는 한발짝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로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 때문에 겪는 '그리스도적인 고통'에서만 자신을 내어 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는 영광입니다.  믿음의 특권, 고통의 특권, 그리고 영광의 특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하신 이 말씀은 사랑의 행동으로 순교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이 명령에 순명하지 못하는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닙니다. 버려진 이들에게 사랑을 행동하라는 최후의 명령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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