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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토마스처럼 머물기를 배워라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3-04-06 조회수689 추천수11 반대(0) 신고



2013년 다해 부활 제2주일


<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


복음: 요한 20,19-31





토마스의 의심


렘브란트(REBMBRANDT) 작, (1634), 모스크바 푸쉬킨 박물관


     < 토마스처럼 머물기를 배워라 >

               일본인 메이저리거 스즈키 이치로(35·시애틀 매리너스). 2010년 열린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한국 비하발언 등으로 다수의 안티팬들이 있지만 야구 기량만은 누구나 인정하는 메이저리그 최고타자입니다.

데뷔해인 2001년 아메리칸리그 타격 1(0.350) 도루 1(56) 최다안타(242·신인 최다안타신기록) 득점권타율 1(0.449) 등을 차지하며 신인상과 MVP를 동시에 석권했을 뿐 아니라 메이저리그 한시즌 최다안타 신기록(262) 보유자이자 7년 연속 타율 3200안타 기록을 세운 타격 천재입니다.

이런 이치로가 경험을 바탕으로 한 야구를 잘하는 방법을 소개해 눈길을 끕니다. 일본 신문 스포츠호치에 따르면 이치로는 ‘12회 이치로배 어린이 야구대회폐막식에서 야구를 잘하기 위해서 흉내 내라!’ ‘즐겨라!’ ‘진실 하라!’는 노하우를 전수했다고 합니다.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는 옛말도 있고, 땀은 속이지 않는다는 말도 있어서 야구를 즐기고, 노력에 진실 하라는 말은 이해가 가지만 사실 흉내 내라는 말은 우리가 듣기엔 좀 어색합니다. ‘짝퉁이 되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치로는 무언가를 따라하려 할 때 최고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창의성은 모방에서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것을 교황님을 선출하는 경당인 시스티나 성당 벽화를 그린 미켈란젤로에게서도 발견했습니다. 제대 벽면에 그려진 최후의 심판이란 그림은 미켈란젤로가 말년에 그린 것이지만 여전히 예수님의 몸통은 바티칸 박물관에 있는 토르소를, 얼굴은 아폴로상을 베낀 것이었습니다. ‘천재 예술가도 죽을 때까지 모방을 하는구나!’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모방이란 것은 보아야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에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아기들이 어떻게 배우는지에 대한 내용이 방영되었습니다. 한 아기는 10개월이 되었는데도 일어서기는커녕 배밀이도 못하고 뒤집지도 못해서 어머니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기와 같은 또래 아기들을 가진 어머니들이 모여 있는 곳에 그 어머니가 아기들을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돌아왔는데 단 며칠 만에 이 아기가 갑자기 배밀이를 하고 일어서서 걷기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아기가 그것을 할 줄 몰랐던 것이 아니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배우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동물들이 태어났을 때 자신이 처음 본 것을 엄마로 생각하기도 하고, 역시 사람도 태어나면 엄마와 자신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을 볼 때, 본다는 것이 나의 실존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는 길게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될 듯싶습니다.

 

보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바오로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코린토23:18)

즉 우리는 그리스도를 보면서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명확히 그분 얼굴을 뵈옵고 그분을 온전히 알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코린토113:12)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나타나셨을 때 그 자리에 함께 있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보지 못했으니 그분을 닮아가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토마스는 교회에 머물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자신만 예수님을 만나지 못해 자존심이 상하지만 끝까지 버틸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나 그분의 상처를 보고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사도의 본질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보지 못하면 변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보기 위해서는 머물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최후의 만찬 벽화를 그릴 때의 일화입니다. 레오나르도는 작품 최후의 만찬을 작업하는 동안 한 가지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묘사하던 중 선을 상징하는 예수님의 모습과 악을 대신하는 유다의 얼굴을 어떻게 묘사해야할지를 놓고 고민에 빠져버린 거지요. 그래서 레오나르도는 작업하는 틈틈이 선과 악, 그 두 얼굴을 대표하는 이상적인 모델을 찾으러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성가대에서 목소리가 기가 막히게 좋은 남성 성가대원을 발견하곤 환호했습니다. 그는 외모적으로 그리스도를 대변하기에 손색이 없었습니다. 그가 젊고, 건강하고, 활기찼기 때문입니다. 레오나르도는 이 청년을 자신의 화실에 초대하였고 그를 모델로 삼아 그렸습니다. 이렇게 오늘날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최후의 만찬의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 탄생한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은 점점 흐르는데 레오나르도는 한 가지 문제를 풀지 못했습니다. 악을 나타내는 유다의 얼굴을 가진 모델을 찾아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흘러 그림이 거의 완성되었습니다. 단지 유다만 제외하곤. 교회의 건물주는 이 미술작품을 속히 마무리하라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거리를 다니며 작품 속의 유다의 얼굴을 떠올리며 모델을 구하러 다녔습니다. 몇날 며칠을 고생한 후, 레오나르도는 참 슬프고, 외롭고, 술에 취해 있고, 현세의 삶과 완전히 동떨어져 사는 듯한 한 젊은이를 찾았습니다. 레오나르도는 그를 자신의 화실로 초대하여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예술가는 이 젊은 주정뱅이의 모습에서 이기주의를, 악을, 옹졸함을, 죄와 모든 타락을 보았습니다. 드디어 레오나르도가 자신의 작품을 완성했을 때, 그 젊은이가 그 작품을 보며 소리쳤습니다. “!~~ 이 그림을 전에도 본 적이 있었는데!” 레오나르도는 너무나 놀라서 젊은이에게 언제 이 그림을 보았냐고 물었습니다. “3년 전에요. 제가 소유한 모든 것을 잃기 전에요. 그땐 전 성가대에서 아름다운 성가를 불렀어요. 꿈도 많았었지요. 어느 화가 분이 저를 초대해 예수님 얼굴 모델이 되어달라고 했었어요.” 그렇습니다. 이 젊은이는 예수님의 얼굴과 유다의 얼굴, 즉 두 얼굴의 주인공인 것입니다.

[퍼옴: 다음카페, 마니피캇오르간반주단,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우리가 어느 환경에 머무느냐에 따라 어떤 사람이 되어가느냐가 결정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어릴 때뿐만 아니라 죽을 때까지도 끊임없이 자신이 보는 것을 모방하며 배우고 그렇게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수산나와 두 노인의 이야기를 생각해 봅시다. 두 노인은 수산나가 목욕하는 것을 매일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자주 보다가 보니 해서는 안 되는 일까지 계획하게 되고, 결국 아무도 없을 때 수산나를 겁탈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TV프로에서 전쟁게임을 매일 하루 종일 하는 여자 청년이 나왔는데 행동 자체가 그 게임에 나오는 사람과 같았고 실제로도 복장을 군인처럼 하고 다니며 음료수 캔을 수류탄으로 생각하고 던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내가 관심 있고 좋아하고 그래서 많이 보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나와 하나가 되어 나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내가 온전히 형성되기 위해서는 환경이 중요한데, 교회만큼 당신을 만나 변화되기 좋은 환경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모방의 일인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니 자신도 걷겠다고 나선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물 위를 걸은 유일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타고 있던 배는 사도단의 배, 즉 교회를 상징합니다. 교회에 머물러 있어야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고 그래서 우리도 그분처럼 변화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교회에 머무를 줄 아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머물 줄 몰랐다면 토마스는 예수님도 다시 볼 수 없었고 또한 이런 고백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 고백하면서 이 세상의 모든 고통들 위를 베드로처럼 걸어갈 수 있도록 만드시기 위한 것이 예수님 부활의 목적입니다. 그 방법은 토마스처럼 힘들더라도 꾸준히 교회에 머무는 방법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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