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주님의 탄생 예고 대축일
작성자조재형 쪽지 캡슐 작성일2013-04-08 조회수331 추천수4 반대(0)


오늘은 동창신부님의 강의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중에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 중에 커다란 것은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부부가 혼인을 해서 가정을 이루고 살지만 부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부모님은 자식들에게 좋은 뜻으로 충고를 하지만 자녀들은 잔소리로 알아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우들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고 싶지만 우리는 신앙인들 안에서도 때로 마찰과 잡음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관계를 맺는 것이 어려운 것은 나 혼자만이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이 함께 맺는 것이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나의 생각과 다른 사람의 생각이 꼭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자신을 모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몇 가지 유형으로 사람들을 구별하려고 합니다. ‘에니어그램, 엠비티아이’와 같은 것은 사람들의 성격을 파악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사람들을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면 ‘급한 사람’과 ‘유한 사람’입니다. 급한 사람은 급한 사람대로 장점이 있습니다. 일 중심적이기 때문에 목표를 설정하면 확실하게 추진합니다. 그런 분들이 있으면 성당의 일들도 잘 돌아갑니다. 그러나 급한 사람은 일을 먼저 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가 쉽습니다. 그러면서 급한 사람은 이렇게 말을 하곤 합니다. ‘그래도 나는 뒤끝은 없다.’ 본인은 뒤끝이 없을지 모르지만 상처를 받은 사람은 오래가곤 합니다. 유한 사람은 성격은 좋지만 일보다는 사람 중심이기 때문에 어떤 일을 처리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곤 합니다. 이런 분들이 성당 일을 하면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면에 급한 성격과 유한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칼바람이라는 별명을 듣는 신부님도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아주 유한 성격의 신부님도 운전대를 잡으면 과격해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잘 모르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그것은 우리 안에 ‘거짓자아’가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자아란 무엇입니까? 태어나면서 우리는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부모, 이웃, 환경, 학습을 통해서 우리는 무의식 안에 거짓된 자아를 만들어 갑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실 때, 하느님의 모상을 닮게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대로 살아갈 때, 우리는 ‘참자아’가 되는 것입니다. 성서는 거짓자아가 우리의 내면에 있는 이유를 ‘원죄의 결과’라고 말을 합니다. 거짓된 자아는 꿈을 꾸면서 정화되기도 하고, 우리들의 무의식적인 행동을 통해서 정화되기도 합니다. 그것이 어려우면 심리치료를 받기도 합니다. 거짓자아를 정화시키고 참된 자아를 회복하는 것이 쉬운 일일까요? 어려운 일일까요? 그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거짓자아를 정화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 7장 15절 이하에서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실상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알 수 없습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은 실천하지 않고 도리어 내가 미워하는 것을 행하니 말입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을 저지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바로 내가 행한다면 그와 같은 일을 하는 자는 이미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깃들어 있는 죄입니다.’ 바오로 사도와 같은 위대한 성인도 자신의 거짓된 모습 때문에 갈등하고 고민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 역시 거짓된 자아에 빠져서 참된 모습을 상실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물건은 그 물건을 만든 사람이 가장 잘 알고, 고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거짓된 자아로 인해서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는 우리를 정화시켜주시고, 고쳐주시는 분은 하느님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청하고, 하느님께 의지할 때, 우리는 거짓된 자아에서 벗어나 참된 자아를 찾을 수 있고, 우리는 인간관계를 잘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공기가 없으면 살 수 없듯이, 신앙인은 기도가 없으면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하느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하느님은 우리의 내면에 당신의 모상을 심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의 내면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내면에 계신 하느님을 만나야 하고, 하느님을 만나서 정화되어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고백록에서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늦게야 임을 알았습니다. 이렇듯, 좋은 분, 내 안에 임 계셨건만, 난 다른 것을 찾아서 헤맸습니다. 하느님을 찾아서 온갖 것을 찾았는데 결국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하는 기도는 크게 4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입으로 하는 염경기도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염경기도를 배우고, 이것을 통해서 기도를 합니다. 묵주기도, 여러 기도문, 9일기도와 같은 것은 염경기도입니다.
두 번째는 생각으로 하는 묵상기도입니다. 성경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내가 해야 할 바는 무엇인가를 판단하는 기도입니다.
세 번째는 가슴으로 드리는 정감기도입니다. 특별한 형식이 없고, 느낌으로 기도를 합니다.
네 번째는 온몸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침묵기도입니다. 침묵기도는 단순하고, 간단합니다. 나의 내면에서 나를 정화시키는 하느님께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향심기도는 네 번째 단계인 ‘침묵기도’입니다. 나의 내면에 있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하는 기도입니다. 기도도 훈련을 해야 합니다. 향심기도는 영적 수준에 머물도록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내면에 있는 참자아를 찾아야 하고, 그 중심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중심을 영어로 'Center'라고 합니다. 중심을 향해서 들어가는 표현은 ‘Centering'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기도를 붙이면 'Centering Prayer'가 되고, 이를 ‘向心祈禱’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는 우리의 거짓된 자아를 정화시키기 어렵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사와 기도입니다. 성사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통로입니다. 성체성사, 고백성사로 치유를 받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그렇게 치유를 받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습관화 되고, 형식적인 성사생활, 기도생활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참된 자아를 만나기 어렵습니다. 몸은 성사와 기도 중에 있지만 우리의 영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침묵기도를 통해서 모든 것을 맡겨드리면 삶의 은총이 생깁니다. 믿음 안에 온전히 맡긴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기도라는 확신이 들었다. 기도하고, 성사생활을 하는데도 내 삶의 변화가 없다면 침묵기도를 해 보십시오. 향심기도를 통해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내 안에 머무시오. 나도 여러분 안에 머물겠습니다. 여러분이 내 안에 머물고 내 말이 여러분 안에 머물러 있으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청하시오. 여러분에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이 내 계명들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게 됩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들을 지켰고 그래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내 계명은 이렇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시오.’

주님 안에 머무는 것, 주님과 함께 사는 것, 그래서 내 안에 있는 참 자아를 만나는 것이 향심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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