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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4월10일(수) 聖 미카엘 데 상티스 님..등
작성자정유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3-04-09 조회수361 추천수1 반대(0) 신고



4월10일(수) 음3/1

聖 미카엘 데 상티스 님..등


 


미카엘 데 상티스(4.10)

성인명

미카엘 데 상티스(Michael de Sanctis)
축일 4월 10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수사
활동지역  
활동연도 1589-1625년
같은이름 마이클, 미가엘, 미구엘, 미키

 



성 미카엘 데 상티스(Michael de Sanctis)


 
 



에스파냐 북동부 카탈루냐(Cataluna)의 비크에서 출생한 성 미카엘은
6세 때부터 자기는 수도자가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가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를 이야기했을 때,
그는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이 성인을 글자 그대로 본받으려고 애를 썼던 것이다.

그 후 양친을 잃었을 때 그는 잠시 장사꾼이 되었는데,
그는 단순한 장사꾼이 아니었다.
그는 매일 할 수 있으면 성무일도를 바쳤고,
시간이 없을 때에는 성모소일과를 바쳤다.





1607년 그는 바르셀로나(Barcelona)의 삼위일체회에 입회하여 서원하였다.
그 후 그는 세비야(Sevilla)와 살라망카(Salamanca)에서 수학한 뒤 사제가 되었고,
그의 덕과 능력을 인정받아 두 번이나 원장직을 역임하였다.
그의 수도자들은 그를 단지 원장으로 뿐만 아니라 성인으로 공경했는데,
특히 그의 성체신심은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현존하심을 깨닫게 하였다.
그는 미사 중에 탈혼에 빠진 적이 수차례나 된다.
그는 36세의 일기로 선종했는데, 1862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시성되었다.

*굿뉴스 자료집에서 발췌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아
어릴 때부터 성프란치스코님을 좋아했던 아이

장사를 하면서도 매일 성무일도, 성모소일과를 바쳤으며

사제가 되어서는 미사 중에 가끔 탈혼에 이르는 등
주님 사랑으로 가득했던
사제 성 미카엘 데 상티스 님이시여,

천상의 기도 가운데 저희를 이끌어 주옵소서!....아멘





 
 


막달레나 데 카노사(4.10)

성인명

막달레나 데 카노사(Madeleine de Canossa)
축일 4월 10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설립자
활동지역 베로나(Verona)
활동연도 1774-1835년
같은이름 마들렌, 막딸레나



베로나의 성녀 막달레나 데 카노사(Magdalena de Canossa)



 
 



1774년 3월 1일 이탈리아 베로나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난
성녀 막달레나(Magdalena)는 어려서 부친을 잃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그녀의 어머니는 자녀들을 남겨둔 채 재혼하여 떠나버렸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8세였다.
그의 형제들은 삼촌 밑에서 자랐는데,
삼촌의 학대 때문에 그녀는 입을 꼭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수녀가 될 마음으로 가까이 있던 카르멜회로 갔으나
성소가 없었던지 돌아오고야 말았다.
그 당시 나폴레옹이 전쟁을 일으켰는데
바로 그 나폴레옹이 그녀의 카노사 성을 둘러보러 왔을 때,
그녀는 용기를 내어 텅 비어 있던 성 요셉(Josephus) 수도원을 달라고 청하였다.
그는 쾌히 승낙하였다.

그녀는 여기서 가난한 사람과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사업을 착수하였다.
또 성녀 막달레나가 베네치아(Venezia)로 갔을 때에는
빛나는 옷을 입은 6명의 수도자들에 둘러싸인 성모님의 환시를 보고
즉시 성모의 명을 따라 사업을 시작했는데,
이 모든 사업은 나폴레옹의 도움이 컸었다.
이리하여 그녀는 ‘애덕의 딸 카노사 수녀회’를 설립한 것이다.

비오 11세(Pius XI)는 그녀를 이렇게 평하였다.
“많은 이들이 자선사업을 하고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으나,
가난한 사람과 더불어 가난해 지기는 지극히 어려운데 그녀는 실제로 가난하였다.”
그녀는 1941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8년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굿뉴스 자료집에서 발췌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마저 재혼으로 떠나버린 외로움 속에서
성모님의 환시를 본 후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는
'애덕의 딸 카노사 수녀회'를 설립하게 되신
성녀 막달레나 카노사 님이시여

님을 기억하는 오늘
저희를 위하여 천상의 기도를 보내 주옵소서!....아멘


 







에제키엘(4.10)

성인명

에제키엘(Ezekiel)
축일 4월 10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구약인물, 예언자, 순교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6세기BC
같은이름  


성 다니엘(Daniel)과 에제키엘(Ezechiel) 예언자




구약성서 대예언서에 속하는 에제키엘서의 저자인 성 에제키엘(Ezechiel)은
기원전 587년 유다 왕국이 멸망한 사건을 전후로
20여 년 동안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한 예언자였다.

에제키엘서는 총 48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에제키엘 자신에 대한 언급은 별로 없다.
에제키엘은 ‘부지’라는 사제의 아들이었다(1,3).
그래서 예루살렘과 성전이 그가 선포하는 메시지의 핵심을 이룬다.
사실 ‘사제’가 에제키엘서를 이해하는 열쇠이다.
그는 혼인도 하고, 자기 집에 원로들을 모아 놓고 말을 할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8,1; 20,1).

그런데 에제키엘서를 보면 그가 매우 독특한 예언자임을 알 수 있다.
구약성서의 가장 신비로운 인물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는 그는,
환시들을 보고 때로는 며칠씩 황홀경에 빠진다(1,1. 4-28; 3,10-15; 37,1-10 등).
많은 상징적인 행동을 하고, 이따금 농아나 마비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또 집에 앉아 있으면서 환시 속에 예루살렘을 돌아다니기도 한다(8장).

에제키엘은 하느님과 동족에 대하여 열정을 지닌 감성적인 사람이었다.
동시에 냉철하고 심사숙고하고
자기의 생각을 엄격한 논리에 따라 전개시키는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훌륭한 신학자였다.
이스라엘 종교의 중심인 성전과 그 의식에 관하여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40장 이하),
민족의 역사와 전통도 자기의 독창적 역사관을 내세울 정도로 깊이 알고 있었다
(16장, 20장, 23장 참조).
그는 또 널리 퍼져 있던 신화나 동화 같은 것을 과감히 받아들여
자기의 가르침에 적용시키는 개방된 신학자였다.
그리고 세계정세(25-32장)는 물론, 당시 세계 최대의 무역항이었던
티로의 교역 내용까지도 훤히 알고 있었다(27,12-25).
또한 조선 기술도 거침없이 서술할 수 있는 폭넓은 지식의 소유자였다(27,3-11).
이러한 박식함은 예언자의 사명 수행에 필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말을 듣는 유다인들은 국제 정치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면서,
국제적으로 보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이스라엘은 ‘반항의 집안’이라고 끊임없이 되풀이되듯,
에제키엘의 청중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한” 이들이었다(2,3).
그래서 그들을 회개시키려고 예언자는 자기의 지식을 총동원하였을 뿐더러,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하느님 백성 전체와 그 구성원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더욱 효과적으로 선포하려는 노력이었다.

사실 에제키엘은 사목자였다.
그는 ‘파수꾼’으로 세워졌다(3,16-21; 33,1-9).
파수꾼은 성안에 있는 이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늘 주변을 살피고,
작은 위험이라도 닥쳐오면 사람들에게 바로 알려,
준비를 갖추고 재난을 막거나 피하게 해야 한다.
그런데 이 ‘예언자 파수꾼’은 외부의 위험만 알리지 않는다.
각자에게 해당되는 경고를 개별적으로 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악인에게는 악을 버리고 돌아서라고 경고하고,
의인에게는 죄를 짓지 말라고 경고해야 한다.
이 파수꾼은 자기에게 맡겨진 이들의 삶과 죽음에 개인적으로 깊이 관여하는
사목자인 것이다.

이 점이 에제키엘을 그 이전의 예언자들과 구분 짓게 하는 큰 특색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시대의 요청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다른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백성 전체에 그분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공동체에게 하느님의 심판을 예고하고 회개를 부르짖으며 또 구원을 약속하였다.
그런데 에제키엘의 시대는 기존의 공동체가 와해되는 때였다.
유다 왕국이 멸망하기 전부터 이미 종교, 정치, 사회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민족 전체가 불행에 빠지면서,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18장).
그래서 예언자는 공동체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못지않게
각 구성원에게도 배려를 아끼지 않아야 했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예언자상도 바뀐 것이다.
에제키엘은 시대의 요청에 따라 달라진 예언직에 과감히 투신하였다.
어떤 면에서 책임이 더욱 무거워졌지만,
그는 주저 없이 말씀의 선포에 모든 것을 바쳤다.
교회에서는 에제키엘을 예언자이자 순교자로 공경하고 있다.

*굿뉴스 자료집에서 발췌



 




현실을 직시했던 이스라엘의 예언자이며 사제였던
성 에제키엘 님이시여

혼란에 빠져 있는 우리 겨레를 위하여
천상의 기도를 보내 주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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