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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평화와 두려움- 2013.4.13 부활 제2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3-04-13 조회수440 추천수4 반대(0) 신고

2013.4.13 부활 제2주간 토요일 사도6,1-7 요한6,16-21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평화와 두려움-

 

 


참으로 평화로운 봄 풍경입니다.

온 누리가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로 가득합니다.

“너희에게 평화를 비노라. 알렐루야. 

  두려워하지 마라. 알렐루야.”

오늘 아침성무일도 즈카리야 후렴이 오늘 말씀 묵상과 일치합니다.


평화를 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최우선 가치가 공존공생의 평화입니다.

대부분 사람들 역시 평화를 찾아 성당이나 수도원에 옵니다.

제가 가장 많이 써드리는 보속 처방전 말씀도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는 요한복음 14장 27절 말씀입니다.

얼마나 많이 써드렸는지
성경책 이 구절이 담긴 페이지는 손때로 누렇게 바랬습니다.

평화를 바라는 마음은 그대로 마음의 두려움과 불안을 반영합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한 밤중 호수 한 복판에서 폭풍 중에 두려움에 혼란을 겪던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 임재하심으로 평화를 찾은 제자들입니다.

위의 말씀은
바로 우리 수도원 십자로의 중앙, 예수부활 상 밑 바위 판에 새겨진 구절입니다.

 

이 말씀 선정 경위가 재미있습니다.
원래 제가 제안한 내용은 ‘평화가 너희와 함께!’ 였는데
형제들은 다른 형제가 제안한 위의 성경구절을 택했습니다.
찾아오는 모든 이들이 공감하는 구절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그렇게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두려움 중에 사는 우리에게는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이 훨씬 마음에 와 닿습니다.
위로가 되고 힘이 됩니다. 마음에 평화를 줍니다.”

 

어느 형제의 고백도 생각이 납니다.
두려움과 불안에 포위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전쟁의 두려움, 노후에 대한 두려움, 병에 대한 두려움, 실직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 끝이 없습니다.

 

평화를 잃었을 때, 평화의 빛이 사라졌을 때 물밀듯이 밀려오는
불안과 두려움의 어둠입니다.

불안과 두려움에서 시작되는 무장(武裝)이요 재물 비축입니다.
믿을 것은 무기요 돈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게 두려움의 심연, 악의 심연입니다.
끊임없이 증폭되는 불안과 불신, 두려움입니다.

힘의 균형에 바탕 한 불안한 평화만이 있을 뿐입니다.

현명한 것 같으나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군비경쟁에 쓰여 지는 돈이 복지로 활용된다면
세계의 빈곤 문제는 다 해결될 테니 말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기에
끝없는 세상 두려움에 포위되어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선사되는 주님의 평화입니다.

 

어제 분도 규칙을 공부하던 한 대목을 잊지 못합니다.
‘아빠스는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규칙을 지키면서 모든 일을 해야 한다.’

‘하늘 무서운 줄 알라’는 말씀도 있지만,
오늘 날 대부분 문제는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의 상실에서 파생됩니다.
아빠스만 아니라 수도승들을 제동하는 두 원리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진정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이들 마음 안에 들려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나다.’란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바로 하느님의 이름이 ‘나다(I AM)'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은 성경에 365회 나오는데
어김없이 이 말씀 뒤에는 ‘내가 너와 함께 있다.’란 말이 나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I AM with us)’,
‘우리를 위해 계신(I AM for us)’ 하느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진정 이를 믿을 때 비로소 주님께서 주시는 마음의 평화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내적평화입니다.
평화를 잃을 때 불신과 불안, 두려움의 엄습입니다.

평화를 잃으면 모두를 잃는 것입니다.
내적평화만 있으면 웬만한 어려움도 다 통과입니다.

하여 미사 때 마다 부단히 주님의 평화를 간청하는 우리들입니다.

 

‘나다’와 관련하여
어제 무심코 십자가의 성 요한에 관한 글을 읽다 눈에 띤 구절도 생각납니다.

성인 영성의 핵심인
‘나다(nada), 나다(nada), 나다(nada)’(무nothing, 무nothing, 무nothing)입니다.

우리 발음인 ‘나다’가 그대로 스페인어 무(無)를 뜻한다니 참 신기했습니다.

바로 아무 것도 아니자(nothing) 모든 것(everything)인,

허무(虛無)이자 충만(充滿)인 역설적 존재인 하느님을 상징합니다.

 

‘나다(I AM)’ 하느님과 함께 할 때 허무인듯 하지만 충만한 삶이요,
아무 것도 아니지만 모두인 삶임을 깨닫습니다.

 

평화 안에는 이미 정의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정의 없는 평화는 공허하고 평화 없는 정의는 맹목입니다.

하여 진정 평화의 사람들은 주님을 두려워하면서
동시에 정의와 공정을 실천합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사도들이 그 모범입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란 배가 불평등의 차별로 난파될 위기에 처하자
사도들은 제자들의 공동체를 소집합니다.

사도들은 말씀과 기도에만 전념하고 사도들의 파트너인 일곱 명의 식탁 봉사자들은 공정하게 식량을 배급하니 비로소 공동체의 평화와 안정입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 한 구절도 생각납니다.

 

“주님의 말씀은 바르고, 그 하신 일 모두 진실하다.
주님은 정의와 공정을 좋아하시네. 그분의 자애는 온 땅에 가득하네.”(시편33,4-5).

 

주님의 자애 안에 내포된 정의와 공정임을 깨닫습니다.

불평등과 차별이 있는 곳에 평화는 없습니다.
정의와 공정이 있을 때 진정한 평화의 실현입니다.

 

복음의 마지막 대목도 의미심장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 데,
  배는 어느 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바로 평화의 주님이 함께 하실 때의 기적을 상징합니다.

내 삶을 뒤돌아보면 어려웠던 긴 시절 같은 데
어느 새 지금 여기에 와 있다는 것 역시
평화의 주님이 함께 하신 기적임을 깨닫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 평화를 선사하시어
우리 내면의 불신, 불안, 두려움을 몰아내시고,
우리 모두 평화의 사람들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peacemaker)!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5,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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