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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님 사랑은 고통의 미학이 아니다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3-04-13 조회수387 추천수0 반대(0) 신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주님,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내 양들을 돌보아라..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이렇게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21, 15 -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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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3번이나 물으시고 베드로도 3번이나 대답을 합니다.3번을 물으시고 3번을 대답하는 가운데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는 미묘한 흐름을 느끼게 됩니다.

사랑의 관계에 대하여 '의식과 전의식과 무의식'의 깊은 곳까지 내려갑니다.겉으로만 사랑한다고 고백하는게 아니라, 베드로는 자신의 깊은 속 마음에 까지 사랑의 고백을 표현합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며 결국 슬퍼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는 물으심에서, 우리가 보고 있듯이 베드로가 <주님을 참으로 사랑한다>는 그 진정어린 마음을 충분히 엿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대답 때마다 <내 어린양들을, 내 양들을 돌보아라>하고 당부하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베드로는 예수님의 어린양들, 예수님의 양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부탁이 간절하게 서려 있다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린양들, 예수님의 양들에게 베드로의 진심어린 고백을 예수님께 대한 사랑으로 드러내어 달라는 당부인 것입니다.

예물보다는 자비를, 형식보다는 실천을 요청하고 계시는 예수님이십니다.예수님의 어린양들,예수님의 양들에게 대한 자비어린 사랑의 실천을 분명하게 강조하시는 말씀이시다고 하겠습니다. 그들을 등한시하고서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벗들이 예수님께 대한 사랑의 진정성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이들을 아낌없이 돌보아 주는 일입니다.떠나는 사람이 떠나기 전에 남아 있는 예수님의 벗들에게 그들을 맡기고 가야하는 마지막 부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같은 말씀으로 간곡하게, 예수님의 어린양들과 양들을 부탁하셨으며 그리고 베드로 또한 주님을 사랑한다고 주저없이 진정고백했듯이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형제들은 여기에서 한치도 어김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고백처럼 쉽지만은 않습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고 해서 사랑의 고백을 뒤집는다면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에는 그 진정성이 따르지 않습니다.비록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같이 매달려 죽는다 할지라도 지켜야만 합니다.

사랑 때문에 겪는 그리스도의 고난(고통)은 결코 고통의 미학이 아닙니다.생각으로나 혹은 몇번으로 하고마는 일시적인 유희의 감흥 정도가 아닌 것입니다. 몸으로, 마음으로 지쳐서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서 쓰러지기를 수없이 반복하면서 끝내 죽어지는 고통입니다

죽어서도 끝나지 않습니다. 무덤 속에서도 죽음과 싸워야 하는 고통입니다.[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사랑의 고통은 먼저 예수님 때문이며, 그것은 곧 예수님의 어린양들 때문에 그러합니다. 예수님만 눈에 보이고 그분의 어린양들은 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예수님도 제 마음에는 실상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하신 예수님이신데 그 분의 마음이 자기 안에 없다는 것은 곧, 자기 안에 예수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분의 어린양들도 사랑하지 못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베드로의 대답 때마다 <내 어린양들을, 내 양들을 돌보아라>하고 예수님께서 신신당부하신 까닭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그들을 하나 하나 돌보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라도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합니다. [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 38 참조)]고 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다른 예수가 아닌, 십자가의 예수님>이십니다.예수님의 어린양들과 양들의 고통에 결합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의 고통에 일치할 수 없으며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할 것입니다. 그들의 고통은 '예수님의 고통'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따름'에는 언제나 믿음이 필요합니다. 또한 무엇에 대한 믿음인가 하는 것이 먼저 중요하며 그 믿는 바를 행동으로 실천하는게 바로 '따름'입니다. 무엇을 따름인가 하는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의 고통을 따르는 믿음이 십자가의 예수님을 따름인 것입니다. 



육신적 감흥에 맛들인 사람은 제 마음 안에 '예수님의 고통'(그리스도적 고통)이 없습니다. 제 마음 안에 예수님이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고통에 결합 못하는 것이며,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자기 마음 안에 사랑하는 이가 자리잡고 있기 마련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간에는 서로 자기 마음 안에 '상대방 사람'(곧, 예수님)이 있는 것입니다. '따름'도 사랑할 때, 사랑하는 이(예수님)를 따라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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