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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3-04-14 조회수662 추천수8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3년 4월 14일 부활 제3주일



“Simon, son of John, do you love me?”
Peter was distressed that Jesus had said to him a third time,
“Do you love me?” and he said to him,
“Lord, you know everything; you know that I love you.”
Jesus said to him, “Feed my sheep.
(Jn.21,17)



제1독서 사도 5,27ㄴ-32.40ㄴ-41
제2독서 묵시 5,11-14
복음 요한 21,1-19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이렇게 공식적으로 인사를 올립니다. 우선 13일 동안 잘 다녀왔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많은 성인 성녀들을 만날 수가 있었으며, 특별히 성모님 성지에서의 소중한 체험들을 간직할 수 있는 은혜로운 시간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소중한 시간을 허락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더불어 더 열심히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겠다는 새로운 결심을 여러분 앞에 감히 해 봅니다. 이러한 결심을 갖고 오늘 새벽 묵상 글 시작합니다.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일대의 성지순례를 하면서 엄청난 성당들을 많이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당을 짓는 기간이 거의 100년입니다. 그러다보니 지금 후대에서 우리가 바라보는 성당은 정말로 으리으리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떤가요? 보통이 1년 이내입니다. 성당을 짓겠다는 봉헌의 마음도 한 2~3년이 지나면 거의 사라지지요. 거의 본당 신부만 발을 동동 구르는 상황에 놓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예전의 선조들은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을 투자했으며 또 어마어마하게 성전을 지은 것일까요? 바로 주님께 최선을 다해 최고의 것을 봉헌하겠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정도면 되었다는 안일한 마음보다는 이 정도로도 주님의 사랑에 보답하기에는 부족하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최고의 것을 최선을 다해 봉헌했던 것입니다.

이번 순례를 통해 주님의 사랑에 대해 많이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내 자신이 뭐라고 이렇게 좋은 시간을 허락해주셨고, 내가 뭐라고 이렇게 많은 은총을 주셨는가? 그러나 이러한 주님의 사랑에 비해 내 자신이 드린 것은 거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순명입니다. 주님의 뜻을 철저히 따르는 순명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 이후 예전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즉, 베드로를 비롯해서 몇 명의 제자들이 고기를 잡으러 배를 타지요. 그러나 아무것도 잡지 못합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했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지요.

예수님께서 고기들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고기가 있는 배 오른쪽을 정확하게 알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 그들의 순명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자신의 말을 정확하게 듣고 따르는 철저한 순명을 원하셨고, 그렇게 순명할 때 차고 넘치는 은총을 받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뜻은 뒤 이어 나오는 베드로와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랑에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으로 돌보는 것이야말로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르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사명에 철저히 순명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때 주님의 넘치는 은총을 분명히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마음은 마치 문과 같아서 매우 작은 열쇠로도 쉽게 열릴 수 있답니다. 그 열쇠들 중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고맙습니다.”와 “안녕하세요.”라는 미소 띤 말입니다(박성철).


지금도 짓고 있는 스페인의 성가정성당.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찾기

오랜 시간 동안 가슴, 심장이 사랑을 관장하는 것처럼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심장 모양을 하트로 표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도 그럴까요? 아닙니다. 그러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심장 이식 수술을 했다고 해서 이제까지 간직하고 있었던 사랑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슴, 심장으로 사랑을 하는 것이 압니다. 사랑은 온 몸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 사랑을 편협한 마음으로만 실천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종종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가슴에 다가와야 사랑을 하지.’

자신의 기준에 맞아야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온 몸으로 무조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아가페적 사랑에 대해 세 번이나 물었던 것입니다.

온갖 이유를 찾으면서 사랑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이제는 사랑할 수 없는 이유보다는 사랑해야 하는 이유들을 찾으면서, 철저히 주님의 뜻에 맞춰 서로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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