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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3-04-20 조회수656 추천수7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3년 4월 20일 부활 제3주간 토요일




Lord, to whom shall we go?
You have the words of eternal life.
We have come to believe,
We are convinced that you are God’s holy one.
(Jn.6,68-69)


제1독서 사도 9,31-42
복음 요한 6,60ㄴ-69

옷에는 많은 주머니가 있습니다. 이 주머니의 용도는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들고 다니기 불편하니까 이 주머니에 넣으라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한때는 주머니가 많은 옷들이 유행했습니다. 그만큼 기능이 많은 옷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머니에 많은 것이 들어 있으면 옷맵시가 나지 않습니다. 볼록 튀어나온 바지 주머니와 양복 주머니의 모습은 그렇게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만약 동전이 주머니 안에 있으면, 움직일 때마다 나는 소리 역시 사람들의 신경을 쓰이게 만드는 것이지요.

아무튼 주머니의 용도는 많은 것을 넣으라는 것이지만, 넣으면 넣을수록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사실 주머니에 무엇인가를 넣고 다니는 것은 건강에도 그리 좋지 않다고 하지요. 뒷주머니에 지갑을 넣고 다니면 골반 뼈가 틀어질 수도 있다고 합니다.

결국 옷에 달려 있는 주머니들은 급할 때 사용하는 것입니다. 사용하면 오히려 볼품도 없고, 건강에도 안 좋아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마음속에도 이런 주머니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 주머니 안을 욕심을 가득 채우려고만 하지요. 그런데 그렇게 욕심을 채우려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기에 좋던가요? 그리고 욕심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건강도 그리 좋지 않습니다. 불안한 마음과 비교하는 마음으로 인해서 이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욕심으로 내 안의 주머니를 가득 채우려는 마음을 버리지 못할까요?

주님이 내 안에 안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보다는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에 집착하다보니 욕심으로 채워야 한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시면 물질적인 것으로 주머니를 채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사랑으로 주머니를 가득 채우려고 노력합니다. 즉, 욕심 주머니가 아닌, 사랑 주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 몇 명이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하면서 예수님 곁을 떠나지요. 그때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묻습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시몬 베드로가 대표로 대답하지요.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신다면 절대로 주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또한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세상의 기준으로 살아가지 않고, 주님의 기준으로 살아가면서 내 안의 주머니를 사랑으로 가득 채워나갈 것입니다.

지금 내 안에 주머니를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욕심 주머니입니까? 사랑 주머니입니까? 주님과 함께 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들의 마음에는 욕심 주머니로만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상대방을 판단하는 데 가장 큰 기준이 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상대방이 아니라 그날의 내 기분, 내 취향, 내 상황. 바로 ‘나’다. 그러므로 특별한 이유 없이 누군가 미워졌다면 자신을 의심하라(김은주).


인천신학교 축제입니다. 사진은 신학교 내에 있는 아고라 라는 주점(?)


 

누가 더 부자일까

많은 재산을 소유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시골로 여행을 다녀오라고 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을 체험해서 지금 자신들이 얼마나 부유한지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다.

여행을 다녀온 아들은 아버지에게 소감을 말했다.

“우리 집에는 개가 한 마리 있지만 그 집에는 네 마리가 있고, 우리 집에는 수영장이 하나 있지만 그 집에는 끝없이 흐르는 계곡이 있어요. 우리 집에는 전등이 몇 개 있지만 그 집에는 무수한 별이 있고, 우리 집에는 작은 정원이 있지만 그 집에는 넓은 들판이 있어요. 우리 집에서는 가정부의 도움을 받지만, 그 집에서는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어요. 우리 집에서는 돈을 주고 음식을 사먹지만, 그 집에는 손수 농사지은 먹을거리가 있고요. 우리 집은 높은 담장이 보호하지만, 그 집은 이웃들이 보호해 주었어요.”

그러고는 마지막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버지, 저는 우리 집이 얼마나 가난한지 비로소 깨달았어요.”

‘좋은 생각’이라는 잡지에서 본 글입니다. 이 글을 보면서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는 과연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쩌면 물질적인 것들의 많고 적음이 아닐 것입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그렇게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누가 더 부자일까요?

예비신학생들과 면담을 하다가 자기 집 가정 형편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상, 중, 하’로 말하라고 하면 대부분이 ‘중’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딱 한 친구가 ‘상’이라고 대답합니다. 부모님의 직업을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평범한 중소기업을 다니시고, 어머니는 대형마트 계산대에서 일하신다고 합니다. 부모님의 직업만 봐서는 가정 형편을 ‘상’으로 말하기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이 친구가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밥 굶지 않고요. 제 방도 있어요. 이 정도면 부자 아닌가요?”

이 친구야말로 진정한 부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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