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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3-04-27 조회수684 추천수10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3년 4월 27일 부활 제4주간 토요일



Have I been with you for so long a time
and you still do not know me, Philip?
Whoever has seen me has seen the Father.
(Jn.14,9)


제1독서 사도13,44-52
복음 요한 14,7-14

한번 다녀온 여행지를 또 다시 가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아 보입니다. 그들은 “나, 그곳에 다녀왔는데...”하면서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며칠 여행한 것으로 그 여행지 전부를 알 수 있을까요?

몇 년 전, 프랑스 성지순례를 다녀올 때에도 그런 말을 많이 들었지요. 순례지가 프랑스라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 다녀온 곳이라서 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프랑스 어디를 다녀오셨냐고 물으면 대부분이 수도인 ‘파리’만을 잠시 들렸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파리만 들렸어도 그들은 프랑스를 다녀온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모습은 신앙인들에게 자주 비쳐지곤 합니다. 주일미사 참석 하는 것으로 교회의 모든 활동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요. 레지오나 빈첸시오 등 교회 단체에서 활동하면 교회의 모든 봉사활동을 혼자서 다 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구역장이나 반장을 하게 되면 동네 사람들을 모두 알고 또 자기가 휘두를 수 있는 부하 정도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과연 자신의 조그마한 활동만으로도 모든 것을 대신할 수 있을까요?

앞을 보지 못하는 형제님이 코끼리의 코를 만지고서 “코끼리는 얇고 또 길게 생겼어.”라고 말을 합니다. 정말로 코끼리가 얇고 길게 생겼습니까? 코끼리의 코만을 만지고서는 코끼리 전체를 말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내가 정말로 직접 만져봤다니까!”

직접 만져보았지만 틀렸습니다. 그런데 우리 역시 이런 모습을 취합니다. 즉, 자신의 부족한 신앙생활과 너무나 적은 봉사활동으로도 충분히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교회의 여러 가지 활동으로 당신 자신을 우리들에게 계속 보여주시지요. 그러나 우리들의 안일한 마음과 세상의 잘못된 기준만을 내세우는 모습으로 인해 주님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청합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를 이루시는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도 하느님을 느끼지 못했던 것은 그들이 아직도 많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지금 모습은 이대로 충분할까요? 더욱 더 부족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과 희생, 봉사의 삶을 다시금 점검해야 할 때입니다. 이 모든 부분에 충실할 때, 분명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를 이루시는 주님을 뜨겁게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곳을 빠져나가는 최선의 방법은 그곳을 거쳐 가는 것이다(로버트 프로스트).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공원인 자유공원의 벚꽃.



내면의 아름다움

어제 인터넷을 보다가 ‘대한민국 성형미인 논란’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올라와 있더군요. 외국 언론과 네티즌들이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한국 미스코리아 참가자 사진을 모아놓고 보니 소름끼친다. 다 똑같이 생겼다. 이건 모 클론(aka 복제인간)이냐.”

이코노미스트 (The Economist)에는 며칠 전에 “성형수술 가장 많이 하는 나라?”로 우리나라가 당당히 선정되었더군요. 그러면서 어떤 한국 여성의 인터뷰가 나와 있었습니다. 그 인터뷰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국에서 성형은 메이크업 하는 것과 같다.”

아름다움을 간직하려는 마음은 당연하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개성을 버리고 인위적인 아름다움을 쫓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40대 이후가 되면 외모는 거의 평준화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동안이라서 젊어 보이는 사람이 없지는 않지만, 그렇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분명히 외모는 평준화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오히려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인정을 받게 되지요.

겉으로 보이는 인위적인 아름다움이 아닌, 내 내면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데 더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내면의 아름다움은 절대로 노화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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