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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를 알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의미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3-04-27 조회수398 추천수1 반대(0) 신고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요한 14, 7 -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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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느님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느님의 존재에 대하여 인간 자신의 능력으로 계시의 은총을 통해 인격적인 하느님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교리서 35 참조 및 그외)

지금의 시대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예수님께 필립보와 같이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라며 말하고 있다 할 것입니다.물론 우리는 인식의 한계에 갇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 하느님의 전부를 알고자 할 때에만 하느님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고 해야 할 것이지만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하고는 조금 다르지 않나 싶습니다. 어떤 연유로 해서 하느님의 모든 것들을 세세하게 알고자 할까요 하고 도리어 반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를 알게 되었으니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하신 말씀이 예수님의 본래 가르침이십니다.<나를 알게 되었으니> 그러하다는 뜻입니다.예수님을 알지 못하면서도 아버지를 알 수 있다 하시는 가르침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겸손한 척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 하면서도 자신은 하느님을 보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가끔씩 있습니다. 그런게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예수님의 말씀 '없이' 하느님을 보며 하느님의 말씀까지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요한 6, 46 참조) 하고 말씀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나를 알게 되었으니>에 그 가르침이 있습니다.

마찬가지 입니다. 지금 당대에서 예수님을 보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예수님 생전의 그 당시에는 예수님을 직접 보면서 예수님의 말씀도 직접 들을 수가 있었겠지만 지금 시대에서는 그것이 아닌 것입니다. 

입으로 그리고 기록으로 전해지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그 당시에는 기록이 필요 없습니다.예수님께서 직접 보이시고 말씀까지 하셨으니 말입니다
이처럼 그때 당시에 아버지를 보며 아버지의 말씀을 듣는다면 그것은 오로지 '예수님 때문'이신 것이었습니다. 

다시말해서 예수님을 보고자 한다면 지금은 성경 말씀을 보여 주기만 하면 다 되듯이 필립보가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고 한다면 예수님을 보여주기만 하면 다 되었던 것이다 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 한가지 여기에는 예수님 말씀(하느님 계시)이 바탕되어 집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드러내심이신 하느님의 계시가 예수님의 말씀이신데 이 말씀에 대한분명한 신앙이 없고서는 지금의 우리는 예수님을 알 수도 없고 또한 아버지 하느님도 알 수가 없습니다. 필립보 역시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없이는 그러하다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드러내심'입니다.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하고 필립보에게 가르쳐 주시고 계시듯이 지금의 우리는 복음 말씀을 보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고 있는 것처럼 필립보는 예수님을 직접 보는 것을 통해서 아버지를 뵙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고 예수님을 보는 것처럼 필립보에게는 아버지를 아는 것이고 이미 아버지를 뵌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기록되어진 '말씀'을 통해서이지만 필립보에게는 직접 듣고 있는 말씀 그자체이신 '예수님'을 통해서인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하지만 그것을 믿지 못한다면 아버지를 뵙지 못합니다.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신다고 가르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의 핵심은 모든 게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필립보는 '하느님의 말씀'인 분이신 예수님을 보고서도 아버지를 뵙게해 달라고 했듯이, 지금의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보고서도 예수님을 뵙게해 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보는 사람은 <나를 알게 되었으니>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또 아버지도 알 수 없으며 아버지를 뵌 것도 아닙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 하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말씀 안에 계시고 말씀은 예수님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은 말씀에 의해서 입니다
말씀에 의해서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보는 것이며, 또한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를 이미 뵙는 것입니다.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믿어라고 하십니다. 그 모든 말씀을 다 이해할 수 없더라도 예수님께서 하신 성경(말씀) 속의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서는 믿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말씀 보다도 오히려 행적이 더욱 믿기가 어렵기도 합니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 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기적들이 표징으로 나타나는 신비이어서 우리는 믿기가 힘들어지기도 합니다.

사람 자신이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께서 자기 안에 계신다면 (머무르신다면) 이는 주님과의 결합인데, 그러하다면 그 사람 각자도 예수님의 모습을 닮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하며 예수님의 행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고통의 십자가 길을 따르고 자기 십자가에서 죽으며 무덤 속에 묻혀 죽음의 권세와 싸워 승리하여 '그 하늘'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성체성사적인 삶을 살다가 예수님 곁으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은 악에 의한 고통과 죄에 의한 죽음을 그리스도적 고통의 십자가로 없애어 버립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육신적인 감흥에 맛들여져 사는 사람과 공동체는 믿음의 거짓으로 악의 고통과 죄의 죽음을 식별해 내지 못하여 없애지 못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하셨습니다.겉으로 보여지는 기적같은 일들만이 하느님의 표징이 아니다는 의미입니다. 악의 고통과 죄의 죽음이 설친다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은총의 일이 아닌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는 가르침은 
각 개인 안에 혹은 각 공동체 안에 악의 고통과 죄의 죽음이 설쳐댄다면 '아버지께서 하시는 하느님의 일(표징)이 아니다'는 그러한 설명인 것입니다. 내 안에, 공동체 안에 성자와 성령의 주님께서 머무르시지 않아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닌 까닭입니다.

가장 보잘것 없는 한 사람에게서 '예수님의 사랑의 은총'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닌 것이며 하느님의 표징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적 십자가 고통이 없는 공동체는 예수의 공동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아니다하고 말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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