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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삶의 의욕 증진법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3-04-28 조회수801 추천수11 반대(0) 신고



2013년 다해 부활 제5주일


<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


복음: 요한 13,31-33ㄱ.34-35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다


PIERO della FRANCESCA 작, (1463-65)


     < 삶의 의욕 증진법 >

            빅터 프랭클(Victor Frankl)은 동족 유태인 600만의 생명을 앗아간 집단 학살에서 살아남은 극소수 중 한 사람입니다. 아우슈비츠(Auschuwitz)와 다카우(Dachau)수용소에서 아버지, 어머니, 형제, 아내를 잃고 극한의 공포와 고통 속에서 정신과 의사인 그는 죽음을 직면해 있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관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발견하게 된 것은 사람들은 저항할 수 없는 고통과 죽음의 문턱에서조차도 삶에 대한 의미와 목적을 찾으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이론화 하여 쓴 책이 인간의 의미에 대한 탐구(Man's Search for Meaning)이며 이 책은 미국에서만도 수백만 권이 팔렸고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열 권의 책목록에도 들어가 있습니다.

 

모든 생존하는 것들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는 말 그대로 생존욕구입니다. 동물들은 생존을 위해 진화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잡아먹기도 하고 교배하기도 합니다. 이 동물적인 욕구가 먹게도 만들고 싸우게도 만들고 강하게도 만들고 머리를 사용하게도 만듭니다.

그런데 그는 사람들이 이런 본능적인 욕구만이 아닌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는 그가 공포에 사로잡혀 아우슈비츠에 들어와 보급 받은 이미 죽은 수감자의 옷에서 찢어진 히브리 성경의 한 구절이 적힌 종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들어라 이스라엘. 진심으로 네 영혼과 힘을 다하여 너의 주를 사랑하라.”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입었던 그 사람은 죽음 직전까지 이 말씀을 삶의 의미로 지니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동물의 생존본능과는 다른 더 고차원적인 삶의 이유를 찾고 있다고 생각을 하며 지내던 중, 하루는 노동하러 나가는데 한쪽에서 독일군 병사들이 음식을 끓이고 있었습니다. 그 냄새에 취해 한 수감자가 대열을 이탈하여 그 곳으로 향하여 걸어갔습니다. 독일군들이 대열로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쏘겠다며 총을 겨누었습니다. 그러나 그 음식 냄새는 총의 위협보다 컸습니다. 그는 계속 걸아 갔고 독일군은 그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살려고 하는 본능보다 당장 죽더라도 음식을 배불리 먹어보고 싶은 욕구가 더 커질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음식을 먹고 살려는 것은 살려는 본능입니다. 살려는 본능이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하찮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프랭클은 더 이상한 현상을 목격합니다. 이렇게 하루 간신히 버틸 음식만 나오는데도 아파서 작업장에 나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때 그의 앞에 예외 없이 하루치 식량이 머리맡에 놓여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시일반으로 모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 자신의 하루치 양식을 희생하고 자신보다 더 힘든 사람을 위해 놓아놓는 것이었습니다.

프랭클은 삶의 의욕이 없는 증상을 노에제닉 신경증(noögenic neurosis)이라 명명하였습니다. 살아야 할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고, 무의미, 무의도, 무목적, 공허감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현대의 무기력증이나 우울증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독일군 음식을 먹기 위해 목숨을 포기한 사람과, 병든 동료를 위해 자신의 양식을 포기한 사람 중에 누가 삶의 의욕이 더 있는 사람일까요? 살기 위해 음식을 먹으려다 죽은 사람일까요, 아니면 살기 위해 먹어야 하는 음식을 다른 이를 위해 포기한 사람일까요?

일반적으로 인간의 완전한 성숙에의 목표나 동기는 자아(self) 수행이나 실현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프랭클이 본 것은 이와 반대였습니다. 자아가 원하는 것은 오히려 자신을 파괴하고 생명을 빼앗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음식을 먹으려다 죽임을 당한 사람이 이런 경우입니다. 이는 마치 부메랑을 던졌을 때 목표를 맞추지 않으면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처럼 삶의 목표나 의미가 자기 외부에 있지 않을 때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만이 목표가 되고 이런 사람은 자신이 던진 부메랑에 자신이 맞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목표를 자아 내부에 두고 추구해가는 것은 자아 파괴적’(self-defeating)이라고 프랭클은 믿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희생했던 그 사람, 자아를 잊는’(self-forgetting) 사람이 더 큰 삶의 의욕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신의 하루 양식을 이웃을 위해 내어주는 사람은 죽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하는 행위의 가치를 높임으로써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삶이 헛되지 않고 가치 있는 것임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프랭클은 결국 자신을 내어주는 자신을 잊는 사랑이 인간 존재이유의 가장 고귀한 욕구라고 결론짓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이 바로 빅터 프랭클 박사가 정리한 내용을 아주 단순하게 가르치신 내용입니다. 하느님께서 서로 영광을 주고받습니다. 영광은 곧 두 분이 내어주실 수 있는 모든 것, 생명, 혹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즉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는 사랑을 하시는 분들이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의 존재원리도 바로 이 자기를 잊는 이타적인 사랑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존재원리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는 사랑인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당신이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십니다. 즉 당신이 아버지를 위해 생명을 바치신 것처럼 또 당신이 우리를 위해 생명을 바치신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하느님의 존재이유인 것처럼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의 존재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즉, 살고 싶지도 않은 것입니다. 이런 의미대로라면 무기력증이나 우울증에 걸리게 되는 이유는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 돈이나 명예, 인기 등으로 자기를 만족시키려는 이유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은 복사에게 신부님이 되어 보라고 권했는데 그 아이가 사제가 되기 싫다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은 너무 힘들어 보여요. 눈에 항상 다크서클이 있어요.”

신자들을 위해 다크서클이 생긴 것은 저로서는 만족스럽고 행복한 것인데 어떤 이에게는 그런 삶이 고통스러워 보이는 것 같습니다. 사실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내 자신을 바치는 것이 가장 큰 행복임을 모두가 깨닫고 있지는 못한 것입니다.

 

강동원, 이나영 주연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란 영화에서 사형수 강동원이 이나영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죽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는데, 사는 게 지옥 같았는데... ... 살고 싶어졌습니다.”

왜 다시 살고 싶어 졌을까요? 지금까지 자신의 친구도 자신의 여자도 자신을 배신했기에 일부러 모든 잘못을 뒤집어쓰고 일부러 사형을 당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젠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것입니다. 부메랑이 자신 밖으로 날아가 목표에 닿은 것입니다.

이나영도 죽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자신의 아픔을 이야기합니다.

나는 자살시도를 세 번 했음. 열다섯 살 때 사촌오빠한테 강간당했음.... 아내도 있었고, 아이도 있었다.... 개새끼..... ”

고등학생 때 이런 아픔이 있어 엄마에게 사실을 이야기했지만 엄마는 어떻게 처신했기에 이런 꼴을 당하냐며 오히려 딸의 뺨을 때리며 나무랐고 이나영은 자신의 사촌오빠보다 엄마를 더 증오하며 살게 된 것입니다.

이나영은 강동원을 살리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강동원을 살게 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도 없기에 병석에 누워있는 어머니를 찾아가 용서해줍니다. 그렇게 용서하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힘들다는 것을 하느님은 아실 것이고 이 희생으로 강동원이 죽지 않게 해 달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이나영도 항상 자신만 피해자라고 생각하며 살다가 이젠 자신이 던진 부메랑이 자신에게가 아니라 강동원이라는 사형수에게 날아가 꽂인 것입니다. 자신이 아니라 남을 위하게 될 때 용서도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기를 잊게 만듭니다. 그래서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에덴동산에서 자아로 상징되는 뱀이 곧 죽음을 준 것처럼, 자아를 위해서 살면 죽음이 오고 자아를 버리면 생명을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서로 자신을 잊고 내어주는 사랑을 하라고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이 생명에 이르는 진리요 생명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셨는데, 이는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만이 자신의 생명을 바치게 만들기에 영원한 생명으로 되돌려 받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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