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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 시대의 카인은 어떤 모습일까?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3-04-30 조회수506 추천수0 반대(0) 신고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우리들의 삶 안에서 어떤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어느 분의 고백을 보면서 떠오른 묵상입니다.

 

화가 나요. 집이 부유하고 부족함없이 자란 애들을 보면 자꾸 분노가 일어요.
왜 우리집은 가난하지 .. 왜 우리집은 저런 기회를 못 잡은거지?

무엇보다도 화가 나는건 그 애들은 심지어.. 교육도 잘 받았다는 거요...

 

그래서 경제적이든.. 사회적으로든 잘 살 수 밖에 없는 습관이 들어있다는거요..

사실.. 이렇게 밖에 못 사는 제 자신에게 화가 나는거에요.



이 마음을 만나고서 어떤 말씀으로 위로를 드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면서

카인과 아벨의 장면이 떠 오른 것입니다.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전할 당시의 신관은 어떤 신관이었을까?

욥의 친구들이 전하는 신관이었습니다.

당시는 하느님께서 우리들의 이 세상 삶을 심판하시는 하느님이셨습니다.

곧 인과응보의 하느님이시라고 믿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자로 사는 것은 그가 잘 살아서 축복 받은 것이고 그가 욥처럼

모든 것을 잃었을 때는 뭔가 하느님 앞에서 잘못한 것이 있기에 그런 것이라는

신관 안에서 살았더랬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마음 한 구석에도 도사리고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 카인의 마음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 그래서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

(창세 4,4-5 참조)

 

카인은 무엇을 보고 화가 났을까?

성경은 어떤 상황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보도가 아니라 의미를 전하고 있다고

배웠습니다. 저는 그 의미를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기꺼이 굽어보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시대 사람들의 소망이고 또한 우리들의 소망이기도한 축복을 듬뿍 받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축복을 듬뿍 받았다는 의미는 어떻게 되었다는 말씀인가?

소위 우리가 말하는 부자가 되었다는 의미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자로 살고 있는 아벨을 카인이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느냐?

그 마음을 성경 저자는 이렇게 표현하신 것은 아닐까하고 묵상해 봅니다.

 

카인도 농부로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카인도 최선을 다해서 하느님께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아벨이 자신보다 더 부자로 살고 있습니다.

카인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합니다.

 

자신보다 더 부자로 만들어 주신 하느님의 처사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하느님을

향해 화를 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합니다. 그렇다면 카인은 어떻게 했어야 하는가?

 

이 물음의 답은 예수님을 통해서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켜 주실 때에 어떻게 하셨나를 묵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오셨습니까?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루카 2,7 참조)

 

이 세상의 삶이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는 여정에 있다고 할 때에 여관이라는

표현은 영원히 사는 집이 아니라 잠시 하룻밤을 자는 곳, 잠시 머무는 집이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잠시 머무실 집도 없으셨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직접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8 참조)

 

이렇게 가난하게 사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셨을 때에 어떻게 하셨는가요? 수많은 군중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고 있는 것을 보시고 마음이 아프셨을 때에 제자들이 내

놓은 것은 무엇었습니까?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마태 14,17)

 

보십시오.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었을 때에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어디에다 붙이겠습니까? 우리들 같으면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이걸로 뭘 한단 말인가?" 하며 실망하고 절망하고 좌절하고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한계를 보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럼 뭘 보셨는가?

하늘을 우러러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하느님의 능력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고 모두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고 하셨습니다.(마태 14, 13 이하 참조)

 

카인을 통해 지금의 제 마음을 이렇게 읽었습니다.

"아, 진정으로 형제가 부자로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며 기뻐하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구나!"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고 볼 수도 있겠구나. 왜냐하면

카인과 아벨 이야기는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 앞에서 죄를 짓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후 가장 처음으로 전하는 말씀이기에 그렇습니다.

 

무엇 때문에 카인과 같은 마음이 되었을까?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그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시어 한 사람을

또 만들어 주셨으니 그를 도울 협력자를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창세 2,18) 그래서 또 다른 사람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에 합당하게 에덴 동산에서 살 때에는

어땠는가?

 

"사람과 그 아내는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창세 2,25)

 

그렇습니다. 서로 협력하여 돕고 사는 처지에서는 부끄러울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저 부족한 것은 서로 돕고 협력하면 되는 것이지 부끄러운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가?

 

하느님께서 살자고 하신 말씀의 약속을 사람이 깨고 난 이후 두렁이를 만들어

서로 협력해서 살면 부끄러운 것이 아님에도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 가리기

시작하게 되면서 변화가 온 것입니다.

 

사람은 가진 것이 많아야 하느님의 사랑을 듬뿍 받은 것이고 행복한 것일까?

적어도 카인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라고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러니 자신보다 가진 것이 많은 아벨을 보고 시기심이 생긴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에덴 동산에서 행복하게 살았던 아담과 하와는 어떻게 행복했을까요?

사람과 아내는 둘 다 알몸이라고 했습니다. 아무것도 자신의 것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에덴 동산이 행복했던 이유는 뭘까요?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았기에 행복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이후는 어떻게 삶의 모습이 바뀌었을까요?

 

그때부터 내 것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내 것이 생기면서 카인의 마음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요?

사실 이 세상 것은 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나조차도 내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내 것은 작고 형제의 것은 많고 그것을 보면서 화내고 슬퍼하고 ...

이러고 사는 것이 카인의 모습은 아닐까요?

 

우리의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요?

행복 자체이신 주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 외에 또 다른 길이 있을까요?

카인이 아벨을 죽였듯이 세상의 많은 것을 누리는 형제가 없어져야 내가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형제를 죽인 카인이 받았던 형벌은 그의 고백에서 보듯이 그가

짊어지기에 너무나 무겁다고 했습니다. 카인의 형벌은 어땠는가?

동생이 없어지고 나면 행복하리라 생각했던 카인이 살았던 삶은 어땠는가?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 들어 보아라.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이제 너는 저주를 받아, 입을 벌려 네 손에서 네 아우의 피를

받아 낸 그 땅에서 쫓겨날 것이다. 네가  땅을 부쳐도, 그것이 너에게 더 이상

수확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세상을 떠돌며 헤메는 신세가 될 것이다.'

 

카인이 주님께 아뢰었다. '그 형벌은 제가 짊어지기에 너무나 큽니다. 당신께서

오늘 저를 이 땅에서 쫓아내시니, 저는 당신 앞에서 몸을 숨겨야 하고, 세상을

떠둘며 헤메는 신세가 되어, 만나는 자마다 저를 죽이려 할 것입니다.'"

(창세 4,10-14)

 

이 고백은 실제로 누군가가 어떤 사람을 죽이고 도망 다니는 이의 고백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므로 카인처럼 형제가 가진 많은 것을 보면서 화를 내고 그럼으로써

형제를 죽이는 마음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처럼 참으로 보잘 것

없고 쓸모 없이 느껴지는 작은 것을 가지고도 하늘을 울러러 찬미를 드리는

삶을 살 것인가? 선택은 우리들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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