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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양심의 박수갈채를 얻어내는 그리스도의 계명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3-05-04 조회수720 추천수11 반대(0) 신고



2013년 다해 부활 제6주일


< 성령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


복음: 요한 14,23-29






하느님의 아들이며 말씀이신 그리스도


(1540-1550), 모스크바 크레믈린 Cathedral of the Sleeper


     < 양심의 박수갈채를 얻어내는 그리스도의 계명 >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란 책, ‘그 한 사람이 그대의 커다란 바다다란 단락에서 참 사랑은 불안해하여 여러 사람을 놓고 재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에게 자신의 전 존재를 걸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즘 연애용어로 어장관리란 말을 많이 쓴다고 합니다. 그 사전적 의미는 이렇습니다.

어장관리: 실제로 사귀지는 않지만 마치 사귈 것처럼 친한 척하면서 자신의 주변 이성들을 동시에 관리하는 태도, 형태를 의미하는 신종 연애용어.’

남자나 여자가 이 사람이다싶을 때까지 자신의 확실한 태도를 취하지 않고 여러 사람을 동시에 자기 범위 안에 가두어 놓는 연애 행태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한 여자와 친해져서 데이트도 여러 번 하고 영화도 보고 손도 잡아서 남자가 좋아한다는 표현을 하면 여자는 이내 냉랭해지며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다고 싫다는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이도저도 아니게 자신의 주위에 맴돌게 만들어 놓은 다음 다른 남자를 또 사귀어보는 것입니다.

김난도 교수가 사례로 들고 있는 A란 여자도 매우 인기 있는 여성이었고 이런 식으로 주위에 남자들이 많았는데, 결국 A양은 집안의 권유로 30대 후반이 되어서야 결혼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장관리를 하면 선택권이 많아서 가장 좋은 사람을 고를 것 같지만 대부분이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A란 여자도 그 많은 남자가운데 선택하여 결혼하였지만 오래지 않아 이혼해서 지금은 혼자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많은 선택권이 있어서 선택을 해도 최상의 선택이 되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누구나 자신의 수준에 맞는 사람이 좋아 보이는 것입니다. 깊이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깊이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을 선택하게 되어있습니다. 자신의 수준이 그런 얕은 수준에 머물러있기에 그런 사람을 만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자신의 가치를 잘 알고 있기에 그 수준에 맞는 상대를 고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그만큼 자존감이 떨어져있다는 말이 됩니다.

 

전에 얼굴에 천연두로 생긴 상처로 가득한 그레이스란 여자가 결국엔 하버드 대학의 가장 멋진 남자와 결혼하여 둘이 모두 미국 국회의원을 지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레이스는 자기 얼굴의 상처가 하느님께서 전염병에서 자기만 살려주신 징표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하느님으로부터 매우 사랑받는 존재라고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팔다리가 없이 태어난 닉 부이치치도 예쁜 여자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도 그렇게 태어난 것이 하느님께서 자신을 어떤 좋은 일에 쓰시기 위해서 그렇게 마련하셨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이 먼저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사랑해 달라고 기대할 수 없습니다.”

 

어장관리를 하는 사람은 자신이 많은 이성 친구를 둔 것에 만족할 수 있으나 실제로는 자존감이 매우 낮은 사람입니다. 누군가로부터 사랑받을만하지 못하다고 스스로 느끼기에 불안하여 다른 보험을 들어놓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자존감이 떨어져있을까요? 대부분 이런 사람들은 자신 안에 풀지 못한 죄책감이 있습니다. 자신이 잘못을 하지 않았어도 싸움을 자주하는 부모 밑에서 자랐을 수도 있습니다. 부모가 싸우면 아이들은 그것이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자신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20년 전에 이경규씨가 진행했던 몰래카메라에서 이승환씨가 크게 당한 적이 있습니다. 대학축제에서 노래를 하는데 미리 짜놓고 그가 나올 때부터 관객들이 박수를 하나도 치지 않습니다. 첫 노래를 부를 때는 노래와도 전혀 맞지 않는 춤을 추는 사람이 나오고, 두 번째 곡을 할 때는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공연장을 나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이승환씨가 받았을 충격은 몰래카메라가 끝난 뒤에도 틀림없이 계속 지속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수가 노래하는데 관객의 호응도 없고 그 사람들이 노래를 듣다가 나가버린다는 것은 그 밑바닥에 있는 생각하기도 싫었던 버려지는 두려움이 현실화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어떤 관객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연극을 합니다. 그 관객이 박수를 쳐주면 자존감이 높아지고 그 관객이 이렇게 야유를 하거나 자리를 뜨는 등의 안 좋은 반응을 보이면 자존감이 떨어집니다.

자존감이 떨어지는 것이 평화를 잃는 것입니다. 평화는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아기가 어머니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때가 평화이고 엄마를 잃고 찾으러 돌아다니는 것이 평화가 깨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자신의 평화를 깨지게 만드는 관객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나를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는 관객이 양심이고, 우리는 그것에 따라 박수를 받기도 하고 야유를 받기도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하느님께 심판을 받기도 전에 이미 평화를 잃게 된 것은 이 양심이 자신들 안에 있으면서 그들의 자존감에 상처를 냈기 때문입니다.

 

양심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근래에 경찰에서 자주 사용하는 거짓말 탐지기로 잘 알 수 있습니다. 거짓말탐지기의 원리는 신체의 자율신경계는 의식적으로 조절되지 않는다는 것에 있습니다. 거짓말을 하면 양심의 가책때문에 아무리 속이려고 해도 혈압, 호흡, 맥박, 땀의 분비, 피부에 흐르는 전기의 양 등에 영향을 주어 그것이 그래프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작년 한 해만 해도 제주올레길 여행객 살해범, 1월 강원 원주시에서 이삿짐을 나르다 물건을 훔친 이삿짐센터 직원, 7월 통영에서 노인 세 명이 지적장애 여성을 수년간 성폭행해 온 혐의 등이 거짓말탐지기로 그 진상을 밝혀낼 수 있었습니다.

 

난타 공연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여러 도구를 이용하여 서로 박자를 맞춰가는 그 모습과 리듬에 저절로 몸이 들썩이게 됩니다. 연극도 노래도 이런 난타 공연도 다 대본이 있습니다. 그 대본대로 하지 않으면 관객은 하나 둘 자리를 뜰 것입니다. 이렇게 나의 마음이 안정을 찾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평화를 빈다!’라고 인사하신 이유는 바로 그 평화를 위해서 오셨다는 뜻입니다. 양심의 동요를 가라앉히실 분은 당신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오늘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만 평화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계명은 무엇이겠습니까?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에겐 이미 하느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고 그렇다면 마음의 평화가 바로 하느님이 내 안에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1882년 프레드릭 카벤다쉬와 토마스 버크를 찔러 죽인 브라디라는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공공연하게 자신을 고발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형 집행 전날, 한 수녀님이 그에게 면회 신청을 했습니다. 수녀는 그를 만나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브라디씨, 저는 어떤 사람을 몹시 미워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해도 용서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데 사실 나의 신앙으로도 그를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수녀에게도 그런 일이 있습니까? 용서하는 데는 까닭이 없지요. 그냥 마음을 풀어 버리면 되는 게 아닙니까?”

이때 수녀는 브라디의 손을 잡으면서, 떨리는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습니다. 나는 뵈닉스 공원에서 버크를 죽인 당신을 용서하겠습니다. 그는 바로 나의 오빠입니다.”

그러자 브라디는 그 큰 눈을 한참 감고 있더니, “죄송합니다. 그리고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저를 고발한 사람을 지금 용서합니다. 이제는 마음이 후련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마음의 평화를 체험하고 브라디는 조용히 숨을 거뒀습니다.

 

브라디가 평화를 찾은 것은 지금까지 받은 대본대로가 아니라 자기 맘대로 대사를 읊으며 살아왔지만, 수녀님이 옳은 대본을 다시 쥐어준 것이고 오랜만에 그 대본대로 따라 읽어서 평화를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평화를 얻을 수 있는 대본이 주어져있습니다. 계명이고 말씀이고 그리스도 자체이십니다. 관객은 양심이고 그 양심은 사실 하느님이 만드신 것이니 하느님의 뜻대로 살면 언제나 박수갈채를 보냅니다. 자존감이 높아진다는 뜻입니다. 양심의 박수를 받으며 사는 것이 평화의 삶이고 그러기 위해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하고 그분 계명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써 주신 사랑의 대본만이 우리에게 평화를 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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