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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내 말을 잘 지켜라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작성자김세영 쪽지 캡슐 작성일2013-05-05 조회수407 추천수8 반대(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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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6주일 (생명주일)
 


 
<성령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 요한 14,23-29<또는 17,20-26>



내 말을 잘 지켜라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의 말씀에 귀 기울이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을 통하여 우리의 구원,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에 눈뜰 수 있기를 희망하고 그로 인하여 내적평화를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살아가면서 사랑이라는 말을 달고 삽니다. 구지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사랑이라는 말은 언제나 기대되고 가슴 설레게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내 방식의 사랑이기에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기대하는 만큼 받지 못해서 애달프고, 준다고 주는데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않으니 속이 상하고 그야말로 미워집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도 만들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은 못 봐서 애타고 미워하는 사람은 봐서 애타기 때문입니다.”(법구경)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희생적 사랑으로 사랑하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요한14,23-24). 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사랑의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그렇다면 계명을 지키는 것이 주님을 사랑한다는 표현이 됩니다. 계명을 구체적 행동으로 지키지 않는다면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실 아버지하느님과 아들예수님,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결속관계를 지속시켜주는 힘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가운데에서 또한 주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귀로만 들을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새겨들어야만 참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그 사람은 말을 참 잘 듣는다’ 했을 때 그것은 귀로 듣고 행동으로 옮겼을 때 하는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왜 들어야 합니까? 주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 안에 온갖 어둠을 물리칠 수 있는 빛이 있습니다. 인간의 한계인 죽음을 이기는 영원한 삶이 있습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약속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보증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이 안내되어 있고 우리가 겪는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이 거기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진리이고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향한 여정에서 주님의 말씀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일상 안에서 생각해 봅니다.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지만 먼저 상대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사랑은 들음으로써 완성됩니다. 상대의 원의를 듣고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취함으로써 증거 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서로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있다면 아직 참사랑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 닮아가서 상대방의 모습으로 바뀌기까지는 결코 완전한 것일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하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십시오! 여러분의 배우자를 사랑하십니까? 먼저 배우자의 소리를 들으십시오. 자녀를 사랑하십니까? 그들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부모를 사랑하십니까?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이웃을 사랑하십니까? 그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십시오. 나의 소리를 시끄럽게 들려주지 말고 먼저 듣고 행하십시오. 사실 듣는다는 것은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3) 하고 말하였습니다. 사랑을 빌미로 상대의 얘기를 듣기보다 오히려 내 뜻을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술에는 주세, 물에는 물세가 부과된답니다. 그런데 말을 함부로 하면 말세랍니다. 우리는 말을 잘 해야 하고 잘 지켜야 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 그 표현이 달라집니다. 수다를 떨기보다 사랑하는 이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사랑은 커다란 맛을 느끼는데 있지 않고 매사에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 결단을 내리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데 있으며 교회의 성장과 하느님의 영광과 명예가 항상 먼저이기를 기도하는데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사랑의 표징들입니다.”뿐만 아니라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나와 다른 그들의 소리를 들어줄 수 있다면 그것이 참 사랑의 표현이 됩니다.

 

사랑한다면서 행하는 행동들 안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허다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스타일에 맞추거나 소유하려는 욕망들에 의한 상처입니다. 가끔은 지나치게 일방적인 사랑 때문에 받는 쪽에서 부담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떠나보낼 수 있는 내적 자유와 떠날 수 있는 자유로움이 공존해야 합니다. 사실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사랑하십니다. 심지어 십자가에 못을 박는 이들의 자유의지를 존중하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행하게 되면 육으로는 고달프고 힘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을 행하였기에 내면의 기쁨은 크고 마음의 평화를 간직하게 됩니다. 말씀을 행함으로써 주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많은 이들이 평화를 갈망하지만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평화는 ‘밖’을 지키는 데에서 오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전쟁준비를 잘해야 평화가 오는 줄 압니다. 제주강정마을을 가보면 담장을 치고 감추면 평화가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쌍용자동차해직자들을 비롯하여 어려움을 겪는 이들의 고통을 매스컴에 내보내지 않으면 평화가 만들어지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감추고 속이는 이들의 마음에 진정한 평화와 기쁨은 없습니다.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감당하며 목소리를 내는 이들에게 오히려 평화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진정한 평화는‘안’에서 오는 것입니다.

 

평화를 원하거든 먼저 하느님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피4,6-7).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또 그 모든 계명과 조문과 함께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에2,14-17).

 

제네시스 수도회 토마스 머튼은 “당신이 평화라고 생각하는 것을 사랑하는 대신에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사랑하십시오! 당신 생각에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미워하기 보다는 당신의 마음 속에 있는 욕망과 무질서를 미워하십시오! 그것들이 전쟁의 원인입니다. 평화를 사랑한다면 불의를 미워하고 폭군을 미워하며 욕심을 미워하십시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 안에 있는 그것들을 미워하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안’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위해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우리 마음이 하느님 안에 평안히 쉴 때까지는 그 어디에도 평안치 못하리라”고 말했습니다. 무엇보다 죄악으로부터 자비를 입어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피로써 이룩하신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평화의 기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Prayer For Peace  < St. Francis of Assisi>



Lord,

make me an instrument of your peace.

Where there is hatred, let me sow love;

where there is injury, pardon;

where there is doubt, faith;

where there is despair, hope;

where there is darkness, light;

where there is sadness, joy.

O Divine Master,

grant that I may not so much seek

to be consoled, as to console;

to be understood, as to understand;

to be loved, as to love.

For it is in giving that we receive;

it is in pardoning that we are pardoned;

and it is in dying

that we are born to eternal life.

 

어느 날 저녁 프란치스코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나가 보았더니 한 험상궂은 나병 환자가 서 있었습니다.


그는 몹시 추우니 잠시 방에서 몸을 녹이면 안 되겠느냐고 간청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의 손을 잡고 방으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환자는 다시 저녁을 함께 먹도록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식탁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그 환자는 다시 부탁하기를 자기가 너무 추우니

프란치스코에게 알몸으로 자기를 녹여달라고 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입었던 옷을 모두 벗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 나병 환자를 녹여주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프란치스코가 일어나보니 그 환자는 온 데 간 데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왔다간 흔적조차 없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곧 모든 것을 깨닫고는 자신과 같이 비천한 사람을 찾아와 주셨던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올렸습니다.

이 기도가 바로 유명한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문'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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