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 갑곶돈대 순교 성지

인간이면 누구나 굴레처럼 안고 사는 ‘고독’이라는 단어가 있다. 고독은 높은
정신세계를 가진 고등 동물에게만 존재하기에, 따라서 인간이기에 누구나
숙명적으로 고독하다. 고독은 우리 인간의 한 중심에 자리 잡고 있어서
어느 누구도 그 자리에 함께 할 수 없는 ‘홀로 있음’의 자리이리라.

허나 이 고독은 ‘고립’과는 다르다. 고독은 홀로 있어도 열려 있지만, 고립은 함께
있어도 막혀 있는 거다. 고독은 세상 시끌시끌한 그 한복판에서도 고요하지만, 고립은
고요 속에서도 대단히 혼란스럽다. 고독은 유한한 인간이 무한의 하느님과 통하는
장소이지만, 고립은 아집과 독선에 사로잡힌 분열과 단절의 장소이다.
그래서 인간은 고독한 자리에서만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고 충만해질 수 있다나.

예수님은 한평생 늘 고독하셨다.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당신
사명을 홀로 감당하시며 사셔야 했다. 광야에서 매우 심한 유혹에 시달리실 때도, 오천
명을 먹이시고 난 뒤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실 때도, 그분 삶의 한가운데에는 이렇게
늘 고독이 있었다. 그리고 제자들이 모두 떠나고 홀로 십자가의 길을 걸으실 때,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성부 하느님마저도 침묵하실 때의 그 고독은 절정이었다.

신앙인도 예수님의 이런 고독과 함께해야 한다. 온갖 유혹에 시달릴 때도,
사람들께 얻은 인기와 그 환호에도, 고통 중에도 신앙인은 그 고독을 안아야 할 게다.
이 삶의 순간에 오로지 우리의 보호자이신 성령께 의탁하며 고독과 머물면서
그분의 진리를 터득해야 한다. 이것만이 유한한 우리가 무한하신 주님께 마음을 열고
그분을 바라보며 외로움을 견디는 것이리라.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요한 15,26─16,3)

예수님은 제자들이 언젠가는 당신에 대하여 증언할 것이라고 예고하신다.
그들이 증언의 삶을 살게 될 때 두 가지를 만나게 될 게다.
첫 번째는 진리의 영을 맞이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박해를 겪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을 제대로 증언하고 있는가?
그 증언의 삶을 위하여 모시고 어떠한 고난도 달게 받아들일 각오를 다지고 있을까?

초대 교회 순교자 스테파노는 유다인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라는 표현처럼 율법에 따라 그는 돌팔매를
맞았다. 억울한 일이다. 순교의 모습은 어쩜 아름답지는 않다. 화려한 것도 아니다.
철저한 고통이며 고독일 게다. 혼자 겪는 싸움일 게다. 그걸 바란다고
순교당하는 것도 아니다. 완벽한 은총의 개입만이 순교의 본모습이리라.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로 돌아가시지만, 그 대신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주님께 속하지 않은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고 박해하겠지만
성령께서 도와주신단다. 세상의 온갖 유혹에 시달릴 때도, 사람들에게 얻은 인기와
환호에도, 모두 떠나고 혼자 남아 있어도, 고통 중에도, 신앙인은 그 고독을
안아야 할 게다.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을 안은 이런 고독과 친구여야 한다.
이 삶의 그 모든 순간에 오로지 우리의 보호자이신 성령께 의탁하며
고독과 머물면서 그분의 진리를 터득해야 한다.  

신앙의 해를 보내는 우리는 세상이 각박하고 험하지만, 가끔 좋은 사람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도 듣는다. 세상의 죄악들이 승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 하더라도 결국은 누군가가 청산해야 할 대가를 치른다.
이것만이 유한한 우리가 무한하신 주님께 마음을 열고
그분을 바라보며 세상의 모든 외로움을 견디는 것이리라.
이렇게 선이 악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있기 때문일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