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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더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는 의미 [예수님이 없는 성령]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3-05-06 조회수366 추천수0 반대(0) 신고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오히려 내가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다. 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요한 16, 5 -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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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성령님께서는 예수님을 증언하신다는 가르침이십니다.너무나도 간단합니다. 하지만 너무 간단해서 일까요. 신자들은 오히려 헤매고 맙니다. 모든 신자들은 (사제, 수도자, 평신도 모두)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 먼저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머무시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 사시지 않는다면) 성령님께서 머무신다 (사신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먼저는 내 안에 예수님을(말씀과 성체를) 모셔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살 수 있다는 가르침을 결코 신자들은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게시글; 성령께서 내 안에 머무시는지 궁금할 경우, 성령과 심령의 차이. 참조>

성령께서 자기 (혹은 공동체) 안에 머무신다면 (오셨다면), 성령님 자신을 증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증언하신다는 말씀이십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보여 드릴 수 없다'고게시글에서, 교회의 가르침으로 '성령께서는 성령의 활동을 통해서만 알 수가 있다' 했습니다. 자기 혹은 공동체 안에 예수님께서 머무르실 때 성령님께서(성령의 활동이)그 사람 그 공동체 안에 사신다 할 것입니다. 

성령의 활동은 자기 안에 공동체 안에 예수님께서 사실 때라는 것입니다.이것이 바로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라는 가르침이신 것입니다.성령께서 머무는 사람(신자)만이 그리고 성령께서 머무는 공동체(형제회)만이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의 힘으로) 살 수 있다.는 너무나 단순한 말씀을 가르침으로 전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가르침은 '성령의 활동'이시기 때문입니다. 복잡하지 않습니다.신자들은 복잡하게 생각함으로써 도리어 헤매는 것입니다. 성령의 활동은 결코 헤매이게 하는게 아닙니다. 단순하고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신자들에게 아버지께서 '하느님의 지혜'를 주신다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지혜가 곧 그리스도이십니다.(1코린토 1, 24 참조)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공동체 안에 머무시는 것이 자기(공동체) 안에 예수님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돈(이윤) 계산의 세상 지혜가 사는지, 아니면 자기 안에 하느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예수님)께서 사시는지에 따라서 성령의 활동 여부가 정하여 집니다. 성령의 활동은 그리스도께서 내 (자기, 공동체) 안에 사실 때에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증언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머무시지 않는 곳에 (자기, 형제회에) 악에 의한 고통이 (부산 어린이 집과 같은 삯꾼들의 학대가) 끊이지 않습니다.그렇다하여 주님(하느님)이신 성령님을 하늘(위)에서 끌어 내릴 수가 있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자기 안에, 공동체(형제회) 안에 예수님께서 머무실 때(사실 때) 성령의 활동이 나타난다 할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살 수 있다는 단순하고 순수한 가르침에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역시 이 가르침도 단순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때문에 살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아버지께 가시는 예수님 때문에 살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하고 말씀하신다고 하겠습니다. 

자기 안에, 공동체 안에, 예수님이 없는 성령은, '주님이신 성령님'이 아니십니다. 인간 안에서 에너지로 생겨나는 '심령주의'입니다. 성령과 심령의 차이는 예수님께서 머무시는지의 여부에 가름됩니다. 주님이신 예수님이시고 내 이름으로 보내시는 성령님이시다는 가르침을 깨닫는 것입니다. 심령은 주님이 (내 이름이) 아닌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자기 안에) 예수님이 머무시지 않는 사람은 성령께서도 머무시지 않습니다.심령을 성령님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없는 공동체 안에서(사람 안에서)악의 고통과 죄의 죽음이 뿌리내려져 있습니다.예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사랑은 악에 의한 고통과 죄에 의한 죽음을 멈추게 합니다.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하십니다.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명하지 못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무엇이 의로움인지를 모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가시고 더이상 예수님을 볼 수 없다고 하여 이제는 성령의 시대인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의로움이란, '하느님의 의로움' 곧 예수님 때문에 산다는 가르침을 명심하여야 하겠습니다. '돈(이윤) 계산 때문에 살고있다'는 공동체는 '예수의 형제회'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그리스도)께서 내 (공동체) 안에 사실 때 그리스도적 고통(고통의 특권이란 버려진 이들의 고통에 결합, 무관심이 아님, 악의 고통에 등한시가 아님)에 결합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으로 악의 고통과 죄의 죽음을 멈추게 합니다. 그리스도적 고통인 십자가의 사랑은, '거짓된 예수의 형제회'가 무엇인지 어떠한지를 알게 합니다.또한 '예수님 없는 성령'은 성령님이 아님을 알게 하기도 합니다.성령님께서는 예수님의 가르침(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기억나게 하십니다. 심판받은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사랑의 십자가)가 아니고  이 세상의 우두머리(돈, 이윤 계산)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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