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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5월 9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R)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13-05-09 조회수682 추천수10 반대(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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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9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R) - 사도18,1-8


 

“바오로는 그들과 함께 지내며 일을 하였고, 회당에서 토론을 하였다.”

 

<황량한 들판에 홀로 서서>

 

 

    바오로 사도의 전도 여행이 항상 활기차고 승승장구하지 않았다는 것을 사도행전은 생생히 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바오로 사도는 현자들의 도시 아테네에서 쓰라린 실패를 체험합니다.

 

    당시 아테네는 석학들의 도시였습니다. 내놓으라는 현자들이 각자의 전문분야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가방끈이 긴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를 바오로 사도는 처절하게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느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쳐 봐도 타락한 이방도시 아테네 사람들은 냉랭하기만 했습니다.

 

    아테네에서 바오로 사도는 진하게 느꼈습니다. 인간의 힘만으로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자신이 너무나도 부족하고 나약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더 간절히 저 열렬히 기도하면서 성령의 도움을 청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아테네에서 얼마나 힘겨운 나날을 보냈는지에 대해서는 코린토 전서 2장3절에 잘 나타나있습니다.

 

    “사실(아테네를 떠나)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나는 약했으며, 두렵고 또 무척 떨렸습니다.”

 

    아테네에서의 쓰디쓴 실패의 기억을 뒤로하고 바오로 사도는 드디어 코린토에 도착합니다. 당시 아테네에서 코린토로 가는 길은 두 가지 방법이 가능했습니다. 육로를 이용하면 꽤나 돌아가야 했으며 이동거리가 약 100Km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배로 지중해를 건너가면 훨씬 거리가 단축되어 하루면 충분했습니다.

 

    코린토는 정말이지 특별한 도시였습니다.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놓여있음으로 인해 흥망성쇠를 거듭했습니다. 코린토는 기원전 146년 도시 전체가 완전히 파괴되는 아픔을 겪습니다. 그러다가 약 100년 후인 기원전 45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다시 재건되어 번영의 시대를 맞이합니다.

 

    당시 로마에서 에페소로 가는 최단거리에 코린토가 있었기에 이 도시는 수많은 여행자들이 지나다녔으며 대대적인 유통구조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인구 면에서나 경제면에서 융성했습니다. 3세기말경 얼마나 인구가 많았던지 노예숫자만 46만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당시 코린토에는 로마인, 그리스인, 에집트인, 시리아인, 소아시아의 여러 나라 사람이 뒤섞여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도시 전체 분위기는 너무나도 당연했습니다. 소비향락의 도시, 유흥의 도시, 도박과 매춘의 도시였습니다. 각 민족의 좋지 않는 풍습들의 총집합소가 코린토였습니다. 얼마나 코린토가 타락한 도시였나 하는 것은 다음의 격언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코린토 식으로 생활한다.” 이 말은 “형편없이 살아간다.” “게을리 놀아난다.” “사치향락에 빠져 산다.”는 말과 동의어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코린토에서는 페니키아인들의 여신 아스타르데 우상 숭배, 그리고 그리이스인들의 신 아프로디테, 판테모스 신에 대한 우상숭배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종합해볼 때 당시 코린토는 거대한 유곽(遊廓)과도 같았습니다. 한 마디로 타락한 도시, 희망이 없는 도시였습니다.

 

    전도 여행길에 나선 바오로 사도는 아예 작정하고 사악한 도시 코린토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민 것입니다. 그런데 아테네에서 쓰라린 실패를 경험한 바오로였기에 거대한 악의 도시 코린토 앞에서 얼마나 두렵고 떨렸겠습니까?


    코린토에 도착한 바오로 사도는 그냥 복음만 전하지 않았습니다. 천막 짜는 일을 하며 자신의 생계는 스스로 책임졌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아무에게도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코린토에 도착한 바오로 사도는 아테네에서 받은 깊은 마음의 상처를 추스르면서 또다시 전열을 재정비합니다. 전번의 실패를 경험삼아 더욱 신중하게 복음 선포를 위한 계획을 짜고 또 다시 고독한 복음 선포의 길을 나섭니다. 바오로 사도는 약 1년 반가량 코린토에 체류합니다.

 

    물론 코린토에서의 복음 선포도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회당에서 복음 선포를 시도했지만 동족들의 반대로 회당에서 쫓겨나 지인의 집에 머뭅니다. 쫓겨나는 바오로 사도의 마음이 얼마나 참담했으면 옷의 먼지까지 털었습니다. 소아시아 지방에서 옷의 먼지를 턴다는 말은 인연을 끊는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말까지 그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여러분의 멸망은 여러분의 책임입니다. 나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다른 민족들에게로 갑니다.”

 

    보십시오. 바오로 사도의 여행길은 낭만과 설렘으로 가득한 행복한 여행길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실패와 문전박대와 야유와 죽음의 위협의 연속이었습니다. 하루하루가 살얼음판 위를 걷는 아슬아슬한 날이었습니다. 코린토에 막 도착한 바오로 사도는 마치 황량한 들판에 외롭게 서있는 한 마리 들개 같았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절대로 바닥에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기도에 기도를 거듭하면서, 연구에 연구를 되풀이하면서 복음 선포를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코린토 사람들이 바오로 사도의 설교를 통해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거의 모든 주민들이 이방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코린토 교회는 바오로 사도가 세운 교회 가운데 가장 열심하고 왕성한 교회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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