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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3-05-09 조회수809 추천수13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3년 5월 9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



You will grieve,
but your grief will become joy.
(Jn,16,20)


제1독서 사도 18,1-8
복음 요한 16,16-20

사람은 학교 다닐 때만 공부하는 게 아니라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합니다. 그런데 공부는 특별히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침에 일어나 성경책을 읽고 묵상하는 것도 공부요, 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뉴스를 보고 듣는 것도 공부입니다. 책을 사서 읽는 공부고, 어른들의 말씀을 귀담아 듣는 것도 공부이지요. 생각해보면 공부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고, 또 마땅히 해야 할 것들입니다. 이렇게 지금 내 삶 구석구석은 공부해야 할 목록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공부는 학창시절에만 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국영수만 공부고 다른 것은 쓸데없는 것이라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요즘 학생들의 모습에서 안타까움을 금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쾌락적인 것만을 추구하고, 쉬운 것만을 선택하려는 모습, 이웃보다는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는 이기적인 모습에 잘못된 공부의 결과란 이런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국영수만이 공부라는 잘못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대신 삶 전체가 하나의 공부임을 깨달아야 겸손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특히 중요한 공부가 있습니다. 신학생 때, 제 영성지도 신부님께서는 항상 이런 말씀으로 영성면담을 시작하셨습니다.

“기도하고 왔어?”

이 질문에 저는 “기도하고 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면담을 하지 않고, “그러면 나가서 기도하고 와.”라고 말씀하실 것 같아서였지요. 또 기도시간에 기도했으니까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도 들어서 솔직히 거짓말로 기도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신부님께서 왜 그런 질문을 던졌을까 라는 생각을 이제야 해보게 되네요.

어쩌면 먼저 하느님을 만나고 당신을 찾아오라는 말씀이 아니었을까요? 하느님을 만나야 영성면담도 하느님 안에서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들은 스스로 잘못된 생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맙니다. 하느님을 만나지 않으면서도 하느님 이야기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나를 또 하나의 우상으로 만들어 하느님의 말씀처럼 흉내 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기도하고 묵상하는 것, 이것 역시 하느님을 만나는 가장 중요한 공부입니다. 그런데 이 공부를 가장 뒷전에 놓고 있었을까요?

하느님을 만나는 공부에 충실한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맞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은 항상 하느님 안에서 큰 기쁨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하느님 만나는 공부에 충실한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 안에서 살 수 있으며, 그때 어떤 시련 속에서도 기쁨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떠나고 싶어 하는 것들을 붙들 방법은 없단다. 알겠니? 곁에 있을 때 사랑해 주는 수밖에 없어(케이트 디카밀로).


공부해야 할 책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글씨를 잘 쓰고 싶어요.

솔직히 ‘글씨 잘 쓴다.’는 소리를 좀 듣고 싶습니다. 사실 제가 초등학교, 중학교 까지는 반에서 서기였습니다. 칠판 글씨, 학급일지, 회의록... 모든 글을 제가 썼지요. 그때는 한 번도 글을 못 쓴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서기도 안 하다 보니, 글 쓸 일이 거의 없어졌지요. 더군다나 신학교에 들어와 타자기, 워드, 컴퓨터 등을 쓰다 보니 직접 펜을 잡고 글을 쓸 일이 더 줄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현재 너무나도 글을 못 쓰는 내 모습입니다.

학창시절에 악필인 친구들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그렇게 글을 못 쓸 수 있니?” 라고 물었는데... 이제 제가 악필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예전의 모습을 떠올리며 잘 쓰려고 노력하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빨리 쓰면 저 스스로도 무슨 글씨인지 알아보기 힘듭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글씨를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혹시 좋은 펜을 쓰면 글씨가 잘 써질까 싶어서 비싼 펜을 구입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글씨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계속 쓰지 않으면 비싼 펜을 쓴다고 해도 글씨체가 좋아지지 않습니다.

글씨를 많이 써야 글씨체가 좋아지는 것처럼, 주님과의 만남도 많이 가져야 그 관계가 좋아집니다. 그런데 그 만남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좋아지기만을 바란다면 어떨까요? 기도나 묵상, 희생과 봉사는 전혀 하지 않으면서 주님과의 관계가 좋아질 수 있을까요?

나와 주님과의 관계. 어떤 관계인지를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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