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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청원기도로 드러나는 하느님과의 친밀감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3-05-10 조회수612 추천수10 반대(0) 신고



2013년 다해 부활 제6주간 토요일


<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


복음: 요한 16,23ㄴ-28
 





     기도는 감사가 핵심일까요, 청원이 핵심일까요?

‘그림 읽어주는 신부’란 블로그에서 그 신부님의 강론 중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서품피정 때 피정지도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기도 중에서 가장 기도다운 기도는 청원기도이다. 어린아이가 자기 엄마와 아빠에게 이것저것을 달라고 졸라대듯이 하느님 아버지께 매달리는 청원기도가 진정한 기도이다.”

우리는 흔히 기도를 할 때,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드리고, 그 다음에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를 간구하라고 배웠기에, 피정지도신부님의 다른 주장에 약간은 당황했다.

그런데 우연히 아이와 엄마의 모습을 보고 그 의미를 발견했다. 하루는 한 아이가 열리지 않는 우유병을 열라고 노력하는 것을 보았다. 얼마 후 엄마가 다가갔을 때, 우유병에 온 신경을 쓰고 있던 아이가 우유병을 자기 엄마에게 내밀었다.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아, 바로 이것이구나. 그분의 자녀로서 내가 마땅히 취해야 할 태도도 모든 문제를 그분께 맡기는 것이로구나.’

아이가 열리지 않는 우유병을 엄마에게 내밀었을 때, 엄마로서 얼마나 기뻤을까?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다. 만일 그 아이가 계속해서 자기의 힘으로만 우유병을 열려고 했다면, 엄마는 안타깝다 못해 엄마를 신뢰하지 않는 아이에게 실망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늘 열리지 않는 우유병을 꽉 쥐고 있는 아이처럼, 풀리지 않는 인생의 문제를 갖고 끝까지 혼자 풀겠다고 우기지 말고,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으면 하느님 아버지께 맡겨야겠다.

[출처: 그림 읽어주는 신부, 2011년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강론]

 

어떤 분이 올 해 시작하면서 하느님께 꾸준히 드리던 청원기도가 있었는데 요즘은 그게 좀 이기적인 것 같아서 드리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이 기도를 포기했으니 이 포기를 보시고 청했던 것들을 들어주시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하지만 청하기는 좀 죄스럽고 그렇다고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닌 아주 복잡한 상태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청원기도를 계속해야 하는지 하지 말아야 하는지가 고민된다고 저의 생각을 듣고 싶어 하셨습니다.

저는 아이가 부모님께 무언가를 청할 것인지 청하지 말아야 할 것인지 고민한다면 이미 부모님과 관계가 멀어져 있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을 들어줄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내가 아니고 부모님입니다. 나는 자녀로서 부모에게 이것저것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말을 꺼내기가 무서워서 뒷걸음질 친다는 것은 부모를 부모로 보지 못하고 무섭고 불편한 존재로 보고 있음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아무리 감사와 찬미를 드려도 그것은 참된 예배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어려워하고 또 가까이 느끼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참다운 감사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감사와 찬미가 기도의 완성이기는 하지만 청원에서 시작하지 않는 감사는 위선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청하라고 하십니다. 당신 이름으로 청하면 무엇이든지 들어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 기쁨이 충만해 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청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것으로부터 오는 충만한 기쁨을 맛볼 수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청하는 빈도가 줄어들면 그것을 통해 얻는 기쁨의 빈도도 줄어들고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오상의 비오 신부님이 관상기도와 묵상기도만을 바친 것은 아닙니다. 끊임없는 청원기도도 바쳤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비오 신부님에게 기도를 부탁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받은 편지는 한 방의 벽면을 가득 채우고도 남습니다.

이러한 청원기도를 바칠 때 비오 신부님은 고통 속에서 희생과 보속을 바치면서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부탁하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고통을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짊어지고서 그가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실제로 자신이 고통 받으며 기도를 바쳤습니다.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고통에 대한 오상의 비오 신부님 어록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고통 자체를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고통을 하느님께 구하는 이유는 고통의 열매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귀양살이하는 형제를 구원하며 연옥 불에서 영혼을 건져냅니다. 고통은 보속입니다. 고통은 나의 일용할 양식이고 기쁨입니다.”

[참조: 비오 신부님의 청원기도와 고통, 피앗사랑, 다음 카페]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무엇을 청해서 얻고 못 얻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가 무언가를 청할 수 있는 분인가 그렇지 못한 분인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청한다는 것 자체가 그분을 가까이 느끼는 것임으로 이미 기쁨은 청할 때부터 나에게 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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