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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3-05-16 조회수728 추천수10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3년 5월 16일 부활 제7주간 목요일



I pray not only for these, but also for those
who will believe in me through their word,
so that they may all be one.
(Jn.16,20-21)


제1독서 사도 22,30; 23,6-11
복음 요한 17,20-26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국가로 모든 구성원의 민권(民權)이 보장된다고 법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즉, 출판, 결사, 언론의 자유가 있지요. 그런데 국민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민권을 서로 방해하는 듯 한 모습을 종종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 대표적인 때가 바로 선거 때입니다. 자기와 다른 정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서로를 적대시하는 모습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긴 이런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건배할 때 여당은 “위하여!”라고 하고, 야당은 “위하야!”라고 한다지요.

이렇게 서로를 분리하는 모습은 신부들을 향해서도 그대로 드러냅니다. 만약 신부가 야당 성향의 모습을 띄면 ‘빨갱이 신부’라는 평을 하시고, 여당 성향의 모습을 띄면 ‘보수 꼴통 신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여당도 야당도 아닌 것 같으면, 시대의 흐름을 뒤처지는 개념 없는 신부처럼 생각하시지요. 그러나 정치적 견해는 다분히 개인적인 것이 아닐까요? 나와 다르면 무조건 거부하고 분리시키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일까요? 특히 교회 안에서 조차 정치적 견해의 차이를 두고서 서로 갈라서고 싸운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배타적인 성향들이 바로 일치가 아닌 분리를 가져옵니다. 즉, 자기와 다르면 무조건 거부하고 보는 모습은 절대로 하나로 만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악마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분리’라고 합니다. 분리를 가져올 때, 사랑 역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기준으로 일치를 가져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세상의 기준으로도 일치를 가져오기는 힘듭니다. 이것 역시 다양한 생각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일치를 가져올 수 있는 기준이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기준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일치를 이루어서 한 목소리를 내시기 때문에, 이 기준을 따른다면 우리 역시 하느님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위해 하늘을 향해 간절히 기도하시지요.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하느님께서 일치를 이루시는 하나의 기준은 바로 ‘사랑’입니다. 이 사랑에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똑같이 생각하셨고, 똑같이 활동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역시 나만의 생각을 기준으로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또한 세상의 기준 역시 강조해서는 안 됩니다. 오로지 사랑 안에서만 일치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사랑을 내세워서 철저하게 실천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가 된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에 의해 일치와 평화를 가져오며, 사랑에 의해 기쁨과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내세워야 할 기준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정치적 성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한 사람이 평생 동안 취할 수 있는 행복의 양이란 그것을 느끼는 능력에 달렸다(조안 리).


임산부와 영유아 축복미사가 답동주교좌 성당에서 있었습니다.



포기할 것은 포기하자.

제가 새벽 묵상 글에도 종종 써서 잘 아시겠지만, 제가 좋아하는 운동은 자전거 타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새벽마다 자전거를 타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연히 인터넷에서 자전거용 스마트폰 거치대를 보게 된 것입니다. 원래는 카메라 삼각대에 스마트폰을 고정시켜서 사진을 찍기 위해서 제작된 거치대이지만, 자전거에 고정시켜서 거치대로 사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지요. 곧바로 구매를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 택배 배달을 받았는데 난감하더군요. 왜냐하면 거치대만 있고, 자전거에 고정시킬 수 있는 도구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회사에 전화를 해보니 자전거에 고정시키는 것은 소비자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선 필요한 것이 거치대의 구멍에 맞는 볼트였습니다. 마침 제가 살고 있는 동네에 공구시장이 있어서, 이곳에서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맞는 볼트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딱 한 군데에서 있다고는 했지만, 하나씩은 팔지 않고 오천 개 들이 한 박스를 구입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결국 포기를 하고 말았습니다. 볼트 하나를 위해 오천 개 들이 한 박스를 구입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것 같았고, 자전거 거치대 하나 때문에 시간을 이렇게 들이는 것도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이것이 안 된다고 화를 내면 나만 손해이지요. 이 경우는 포기하는 것이 이래저래 좋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포기해야 할 것을 포기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화도 나고, 또 어쩔 줄을 몰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도저히 바꿀 수 없는 경우라면, 또한 내게 많은 손해만을 가져다주는 것이라면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는 것도 지혜와 용기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닐까 싶네요. 물론 할 수 있는 것을 힘들고 귀찮다고 포기하는 것은 절대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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