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성령을 통하여) 너에게 나를 보낸다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3-05-18 조회수1,158 추천수10 반대(0) 신고



2013년 다해 성령강림 대축일


<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


복음: 요한 20,19-23







 성령강림


Restout, Jean 작, (1732), 캔버스유화, 465 x 778 cm, 파리 루브르 미술관


         신학생 때 이탈리아로 유학 가서 맞는 첫 방학은 2달 동안의 봉사활동으로 보냈습니다. 이태리 북부에 있는 꼬똘렝고라고 하는 지체부자유자 장애인 시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달 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발목 관절에 통풍이 올 정도였습니다. 이태리 말도 잘 안 되는 데다 특히 환자를 돌보는 일이 고됐습니다. 제가 도왔던 파트는 성인 남자 병동이었는데 심지어 그들을 휠체어에 태워 대소변을 보게 하고 밑도 제가 다 닦아 주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심지어는 뒤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대장 안에 난 종기에 약을 발라주기까지 하였습니다. 나중에는 꼬똘렝고 수사님이 말을 잘 안 듣는 이들의 등짝을 손바닥으로 가끔 때리는 것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저도 말을 안 듣는 등치 큰 아저씨의 다리를 발로 걷어찬 적도 있습니다. 그랬더니 그런 시늉만 해도 말을 잘 들었습니다. 물론 그 일로 고백성사를 보았습니다.

저는 사랑을 하면 행복하다고 배웠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렇게 엄청난 사랑을 남에게 주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다 큰 어른의 엉덩이까지 닦아주다니요! 그러나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빨리 다시 로마로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머리가 혼란스러웠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는데 왜 행복하지 않을까?’

 

이태석 신부님은 하루에 300명의 환자를 진찰하고 잠 잘 시간도 없었지만 아무리 밤늦게 찾아오는 환자라도 거절하거나 인상을 찌푸린 적이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며칠 동안 걸어 온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모습을 보면 힘들어한다는 모습보다는 행복이 표정에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평안하게 죽음을 맞으셨습니다.

비슷한 봉사를 하는데, 도대체 차이가 뭘까?’

남편 분들을 열심히 수고해서 돈을 벌어다 준 보람을 느낍니까? 아내들은 남편을 내조하고 자녀를 키워준 보람을 느낍니까? 그 큰 고생을 했는데 행복하지 못하다면 그 수고는 다 어디로 간 걸까요?

 

요즘에서야 그 이유를 깨닫는 것 같습니다.

달마야 놀자란 영화에 보면 스님이 박신양과 그 일당들을 보고 깨진 독에 물을 채우라고 합니다. 그들은 도망 다니는 처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독에 물을 채우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밑을 막아보기도 하고 배 위에 올려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헛수고입니다. 결국 박신양은 무엇을 깨달았는지 그 항아리를 들어 연못에 던집니다. 그랬더니 연못 속에 빠진 독에 물이 가득 찹니다.

제가 꼬똘렝고에서 그렇게 고생하고도 행복을 느끼지 못했던 이유는 제 독이 깨져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 대축일입니다. 성령은 선물자체이시고 사랑자체이십니다. 사랑하면 주는 것이기 때문에 신학에서는 성령님을 선물자체나 사랑자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은 누구실까요? 하느님이시지만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으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성령을 통하여 아드님 안에 사신 것과 같습니다. 사랑해서 주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인데, 그 자신의 존재를 사랑의 형태로 전해주시는 분이 성령이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렇습니다. 사랑이라고 다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그 표현의 능력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면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내가 사랑한다고 우겨도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척 한 것 뿐인 것입니다.

만약 내가 저들에게 무언가를 해 주었다라고 생각할 때는 내가 사랑이 되어 저들 안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저 내가 무언가를 해준 것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내 존재가 사랑의 형태로 변해서 누군가의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이는 성령께서 주시는 사랑의 표현을 통해 - 물론 우리에게는 성령으로 축성되는 성체성사가 그 완성이지만 - 우리 안에 선물로 오시는 것이지 그리스도께서 당신은 가만히 계시면서 무언가를 집어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만약 내가무언가를 집어서 누구엔가 준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전혀 사랑으로 다가간 것도 아니고 결국 그들에게 해 준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대학교 다닐 때 점심도 아끼기 위해 굶은 적이 많습니다. 그 때 아는 형의 생일임을 알고 주머니를 털어 2천 원짜리 주걱처럼 생긴 책갈피를 선물했습니다. 그러나 그 형은 나중에 그것을 가지고 아이스크림을 퍼 먹으며 별 쓸모없는 것처럼 이야기했습니다. 그 때 저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 선물에 저의 존재가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주더라도 그냥 줄 수 있고 그 물건 안에 나의 존재를 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길 지나가다가 행려자가 있어 만 원을 던져주고 오는 적도 많은데 저는 그 만원을 어디에 쓰건 신경 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그 돈엔 저의 존재가 많이 들어가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내가 돈 만원을 준 것 뿐입니다. 어떤 사람이 고아원에 라면 몇 박스를 가져다주고 사진을 찍어 가면 더 이상 그 라면엔 관심이 없을 수도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존재를 얹지 않은 줌은 그냥 주는 것이지 내어줌이 아닌 것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자녀에게 만 원을 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그것을 버리든지 피시방 가서 다 써버리든지 신경이 안 쓰이겠습니까? 같은 만 원이라도 그 안에 사랑이 들어가 있을 수 있고, 또 들어가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라면 끓여먹으라고 라면을 사 주었는데 가져다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신경이 안 쓰이겠습니까? 그만큼 사랑이 담겨있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가 버려짐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태석 신부님이 톤즈 아이들을 모아서 만든 브라스 밴드가 얼마 전 우리나라에 왔었고 저는 잠깐 아침방송에 출연한 것을 보았습니다. 전쟁을 많이 겪었던 그 아이들에게는 눈물이 가장 부끄러운 것이지만, 신부님이 돌아가신지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분 이름만 듣고도 눈물이 글썽이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지금 그들 마음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준 것은 당신 자신이고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시지만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사시는 것처럼, 사랑은 자신의 존재를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사랑이 당신 존재를 품고 내려오신 날이 오늘인 것입니다.

 

임금님을 사랑하는 한 시골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사과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그 해는 워낙 농사가 잘 되어 먹음직스런 사과들이 많이 열렸습니다. 그는 그 중에서 가장 빛깔 좋은 것 몇 개를 골라서 임금님께 드리려고 궁궐로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문을 지키고 있던 이들은 의복도 입지 않고 고작 사과 몇 개 드리려고 임금님을 만나려고 하느냐며 그를 야단쳤습니다. 가장 좋은 옷을 골라 입고 나왔지만 궁궐을 출입하는 귀족들의 옷에는 비길 바가 못 되었습니다.

그가 실망하며 돌아서는데 마침 왕비가 밖에서 궁궐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왕비는 임금에게 굉장한 사랑을 받고 있었고, 동시에 백성도 사랑하는 분이었습니다. 왕비는 마차에서 내려 슬픈 표정의 농부에게 이야기를 듣고 잠시 기다리라고 하며 그에게서 사과를 받아서 궁궐로 들어갔습니다.

궁궐로 들어간 왕비는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금 쟁반에 사과를 담아 임금 앞에서 직접 깎아 주었습니다. 임금은 사랑스런 왕비가 깎아주는 사과를 맛보고 너무 맛있다며 고마워하였습니다.

왕비는 그 때서야 그 사과는 밖에서 기다리는 한 농부가 임금을 위해 가져온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임금은 당장 그 농부를 불러들이라고 하고 그에게 좋은 의복과 상을 주며 언제라도 수확한 것을 자신에게 직접 가져와도 된다고 허락하였습니다.

 

이 왕비의 역할을 하시는 분이 성령님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참다운 사랑의 행위가 되려면 성령님이 필연적으로 중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성령님이 계시지 않으면 어떤 행위도 참다운 사랑의 행위가 되지 않고 헛수고가 되고 그 보람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자신의 갈빗대를 봉헌하여 하느님이 그것으로 하와를 창조해 주실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스스로 무언가를 한다고 하면 절대 만족스럽거나 양심을 충족시켜줄 수 없습니다.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기면 그 분이 나를 사랑으로 만들어 누군가에게 보냅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하느님에게 봉헌하면 하느님이 나를 성령에 태워 그 누군가에게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에게 나를 보낸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제를 통하여 성체의 모양으로 오시는 이유는 당신 온 존재를 주셔야 하는데 스스로는 당신 생명을 가져오실 수 없으시기 때문에 반드시 그것을 옮겨주는 중재자가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것이 당신 자신을 아버지께 드리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이 봉헌을 성령으로 만드시어 우리를 재창조하십니다. 이것이 성령강림의 의미입니다. 밀이 아무리 빻아져도 물과 불이 없으면 밀떡으로 구워질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이 우리와 함께하시지 않으면 아무리 사랑을 하고 싶어도 그 표현방식을 통해 나의 존재를 실어서 내어 줄 수 없습니다. 내가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닌 성령을 통해 나를 보내는 것이 참 사랑입니다. 어떠한 것도 성령으로 버무려지지 않으면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만이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을 줍니다. 이것만이 하느님의 법에 맞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을 통하여 선물이 됩시다. 사랑이 됩시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